소현세자의 독살설에 대한 의학적 고찰

Medical Investigation into the Alleged Poisoning of Crown Prince Sohyeon: Who Killed Crown Prince Sohyeon?

Article information

Korean J Leg Med. 2024;48(3):61-101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24 August 31
doi : https://doi.org/10.7580/kjlm.2024.48.3.61
Department of Forensic Medicine and Institute of Forensic Medicine, Seoul National University College of Medicine, Seoul, Korea
유성호,orcid_icon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법의학교실,법의학연구소
Correspondence to Seong Ho Yoo Department of Forensic Medicine and Institute of Forensic Medicine, Seoul National University College of Medicine, 103 Daehak-ro, Jongno-gu, Seoul 03080, Korea Tel: +82-2-740-8351 Fax: +82-2-764-8340 E-mail: yoosh@snu.ac.kr
Received 2024 July 24; Revised 2024 August 17; Accepted 2024 August 21.

Trans Abstract

Crown Prince Sohyeon (1612-1645) was the eldest son of King Injo, the 16th monarch of the Joseon Dynasty. Following the defeat in the Manchu Invasion of Korea (1636-1637), he was taken as a hostage to Qing China along with his younger brother, Prince Bongrim (later King Hyojong), and returned to Joseon after eight years in 1645. He died in the same year without ascending to the throne. Allegations of his poisoning emerged based on entries in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leading to widespread acceptance of the poisoning theory and the creation of various cultural works. Although scholars of traditional Korean medicine have published papers suggesting a disease-related death, no thorough medical analysis has been conducted. This study aims to review historical documents to analyze the medical history of Crown Prince Sohyeon and ascertain his cause of death. The study found that Prince Sohyeon began experiencing respiratory, digestive, and urinary symptoms during his time as a hostage in Qing China. The symptoms included fever, cough, dyspnea, thick saliva, thirst, loss of taste, postprandial fatigue, abdominal pain, and dizziness, which persisted even after he returned to Joseon. He eventually succumbed to what appears to have been a respiratory illness characterized by persistent fever and dyspnea. Based on the documented symptoms, it is hypothesized that the cause of death was sepsis. However, given the chronic nature of the symptoms, an underlying autoimmune or metabolic disorder is also suspected as the primary cause, although this cannot be confirmed from the available historical records.

서 론

이왕(李滉) 즉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는 조선 중기의 왕세자로, 제16대 왕인 인조의 첫째 아들이다. 그는 병자호란(1636-1637)의 패전 이후 1637년 청나라에 동생인 봉림대군(후일 효종)과 함께 인질로 보내졌다. 이는 당시 병자호란 패전의 항복 조건으로 조선의 왕세자와 다른 왕족들을 청나라에 인질로 보내는 것이 요구에 따른 조치였다. 소현세자는 1625년 조선에서 그리고 인질로 잡혀 있던 1639년 청에 의해 세 차례나 세자에 책봉되는 이전에 없는 굴곡을 겪으면서 청나라의 생활을 보내다가 1645년 조선으로 8년만에 돌아오게 되지만 끝내 왕위에 오르지 못한 채 돌아온 해인 1645년 사망하였다[1-3].

이러한 비극적 운명의 소현세자에 대한 관심은 1964년 Kim의 연구[4]를 통해 최초로 크게 조명되었다. 이 논문에서는 당시 소현세자가 아담 샬 폰 벨(Adam Schall von Bell)과의 교유를 통해 서양과학에 대한 수준 높은 이해를 가졌으며 당시 청의 유력자와 교유하여 국왕대리 수준의 지휘를 획득한 것으로 보았으며 특히 소현세자가 서구과학과 천주교에 대해서 비상한 호의와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왕에 즉위하였다면 조선의 자주적 근대화가 가능했다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성향으로 인조와 명분론과 현실주의적 갈등이 발생하였고 소현세자가 타인에 의해 사망했다는 독살설을 제기하였다. 더욱이 세자의 죽음 이후 세자빈 강씨가 인조 독살 미수의 역모사건으로 사사까지 받은 상황과 소현세자의 세 아들이 제주 유배를 가면서 곧이어 의문스러운 죽음이 발생한 사실을 근거로 이후 소현 세자의 독살이 기정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역사학적 해석을 통한 소현세자 독살설이 대중에게 전파된 후 그에 대해 대중의 호의적 평가가 지속되면서 독살을 기반으로 하는 현대 창작물이 꾸준히 만들어지면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후 한의학을 기반으로 하는 소현세자 사인 분석의 논문[5,6]과 소현세자의 독살설에 대한 역사학계의 반론[7-10]이 제시되었으나 현대 의학의 관점에서의 소현세자의 사망원인과 사망의 종류에 대한 해석은 이루어진 바 없다. 본 연구의 목적은 소현세자의 병적 증상과 죽음에 대해 기술된 역사학적 문헌을 조사하여 현대 의학적 해석을 통해 소현세자가 실제 앓고 있었던 질병의 종류를 추정하며 특히 사망원인을 판단하는 법의학의 관점에서 분석하여 의학적 사망원인과 사망의 종류를 추정하려고 한다.

재료 및 방법

소현세자의 사망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본 논문에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심양일기, 소현을유동궁일기 및 심양장계에서 병적 증상과 징후 및 사망과 관련된 사항을 추출하여 연구에 활용하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조선(1392-1897)의 조정에서 역대 왕인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간의 왕들의 재위 기간을 단위로 편찬한 공적인 연대기이다. 실록에서는 연월일 순으로 주요 정무 기록들이 정리되어 있으며 조회 때의 대화, 논의 내용, 상소문 및 사관(史官)의 논평이나 비평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우리말로 번역되어 온라인 인터넷 접근(https://sillok.history.go.kr/main/main.do)이 가능하며 소현세자 병세의 증상이 나타나는 시점부터 사망까지 분석하였다.

승정원일기는 조선 시대의 중앙 행정 기구인 승정원에서 작성한 일기 형식의 공식 기록물로 왕의 명령을 집행하고 보고하는 기구로서, 왕과 신하들 간의 대화, 명령, 보고 등의 확인되며 현재까지 약 3,243책이 남아 있어 조선 시대의 여러 기록 중 가장 방대한 양이며 인조의 재위 기간의 내용은 모두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으며 국사편찬위원회 승정원일기 데이터베이스(https://sjw.history.go.kr/main.do)나 한국고전번역원의 데이터베이스(https://db.itkc.or.kr)로 접근이 가능하였고 소현세자의 병세와 사망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하였다.

심양일기는 조선의 소현세자가 청나라 심양(현재의 중국 선양)에서 인질로 머물렀던 기간 동안의 경험을 기록한 일기체 서적이며 소현을유동궁일기는 심양일기에서 이어지는 내용으로 1645년(인조 23년) 2월 17일부터 같은 해 6월 12일까지 약 5개월의 일기가 확인된다. 본 연구에서는 번역본인 민속원 출판사의 ‘역주 소현심양일기, 소현을유동궁일기’을 이용하여 서적의 내용 중 소현세자의 병적 증상과 징후를 추출하여 분석하였다.

심양장계(瀋陽狀啓)는 조선 인조 시대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 심양에서 볼모 생활을 하던 동안 조선 조정에 보내는 보고서로 당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서 겪은 일들, 건강 상태, 정치적 상황 등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그들의 생활과 정치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사용되어 왔다. 본 연구에서는 아카넷 출판사에서 번역된 ‘심양장계: 1637-1643년 심양에서의 긴급 보고’의 서적을 이용하여 소현세자의 병적 증상과 징후를 추출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조선 소현세자의 사망원인에 대해 이 다섯 가지의 역사 기록물 및 이에 대한 해석 연구를 수행하여 현대 의학적 병인론에 근거하여 사망원인과 사망의 종류를 추정하고 고찰하였다.

결 과

조선왕조실록에 기재된 소현세자의 질병과 관련된 기록을 살피면 소현세자는 인조 23년인 1649년 4월 26일에 사망하였다(Appendix 1). 당시 실록에는 시신의 양태에 대한 기술은 없이

세자가 10년 동안 타국에 있으면서 온갖 고생을 두루 맛보고 본국에 돌아온 지 겨우 수개월 만에 병이 들었는데, 의관(醫官)들 또한 함부로 침을 놓고 약을 쓰다가 끝내 죽기에 이르렀으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슬프게 여겼다.

로 기재하고 있으며 다음날인 4월 27일에는 염습(斂襲)을 마치고 사망한 후 처음으로 거행되는 제사 의식인 습전(襲奠) 상례(喪禮)가 시행된 기록이 확인된다[11]. 승정원일기에서도,

왕세자가 훙서하였다: 오시(午時)쯤에 왕세자가 훙서(薨逝)하였다. 약방의 문안에 대해, 망극한 참변을 당하였다는 비답: 약방이 문안하니, 답하기를, “뜻밖에 이런 망극한 참변을 당하였다.” 하였다. - 《약방일기》에 의거함 -

이라는 사망 사실만이 기록되어 있다[12]. 다만 사망 약 2달이 지난 인조 23년(1649년) 6월 27일에 시행된 장례 후 일정 기간이 지나서 고인을 기리며 올리는 제사인 졸곡제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13].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幎目)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 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藥物)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외인(外人)들은 아는 자가 없었고, 상도 알지 못하였다. 당시 종실 진원군(珍原君) 이세완(李世完)의 아내는 곧 인열 왕후(仁烈王后)의 서제(庶弟)였기 때문에, 세완이 내척(內戚)으로서 세자의 염습(斂襲)에 참여했다가 그 이상한 것을 보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한 것이다.

이러한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을 근거로 1964년 Kim의 연구[4]에서는

세자는 귀국 두 달 만에, 병증이 있은 지 3일 만에 34세의 장년으로 급서 하였던 것이다. 시체는 전신이 완전히 검게 변해 있었으며 일곱 구멍에서 출혈하고 있어 독살된 혐의가 짙은데, 그 후의 인조의 태도는 세자가 독살되었으며 그 장본이 인조라는 심증을 굳게 하는 것이었다. (중략) 결국 소현세자와 강빈의 비극은 현실과 명분의 갈등의 소산이며 숭명 반청을 기치로 하는 인조 정권의 제물이었으며 호란과 더불어 반정의 결과였던 것이다.

로 해석하였고 이는 이후의 독살설 주장의 강력히 근거가 되었다.

1. 소현세자는 독살되었는가?

소현세자 독살설과 관련하여 의학적인 쟁점 사항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소현세자의 시신에서 나타난 소견을 바탕으로 사망 원인을 독살로 판단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실록에서는 앞서 언급하였듯이,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幎目)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 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藥物)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로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쟁점은 사망 후 관찰된 소현세자의 시신의 변화가 실제로 당시 조선 중기에 사용된 독물로 인한 것인지 여부이다. 조선 중기 사용될 수 있는 독극물을 살피면 대표적으로 죄를 지은 사람에게 임금이 직접 하사하는 독약인 사약(賜藥)을 들 수 있는데 사약의 적확한 성분은 문헌이 남아 있지 않으며 연구 결과도 발표된 바 없어 현재로서 그 실체를 알 수는 없다. 다만 사용된 그 성분으로 비소, 수은의 가능성과 함께 부자(附子), 초오 및 협죽도의 독성 성분으로 알려진 천연 알칼로이드인 아코니틴(aconitine) 등을 대표적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독살의 성분이 명확히 기재된 것으로 총 3건으로 모두 비상(砒霜)으로 확인된다[1416]. 이 비상은 비석(砒石)을 불에 태워서 얻는 백색 분말체로 주 성분은 삼산화 비소(As2O3)이다. 이러한 비소 중독일 경우 복부 통증과 구역 및 구토 또는 설사가 동반되며 사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사망자에 대한 부검 사례에서 시신의 외부 소견에서도 일반 사망자와 차이가 없으며 고농도의 비소 투여에도 코와 입 및 귀 등에서 출혈성 경향이 관찰되지 않았다[17,18]. 신체 내부의 부검 소견에서도 각 장기의 울혈이 보였으며 다만 폐에서 출혈성 부종이 관찰될 수 있으나 기도나 식도 내에 출혈이 발생하는 소견은 보이지 않았다. 실제 비소의 만성적인 중독에서도 피부의 과다각화증(hyperkeratosis)이나 국소적인 과다색소침착(hyperpigmentation)이 확인되며 피부의 검은색의 전반적인 변색은 비소 중독 사망자나 중독에 의한 생존자에서도 보고된 바 없으며 쥐와 생쥐를 이용한 비소 중독 실험에서도 비소 중독에 의한 피부의 변화는 관찰된 바 없다[19].

수은 중독의 경우에도 대개 심각한 복통과 구토 및 구역 또는 설사 등이 동반되며 사망할 수 있는데 이러한 경우에도 비소 중독 사망자와 같이 신체 외표면에서는 일반 사망자와 같으며 피부의 변색 등은 역시 보고된 바 없다[2022].

한편 부자, 초오 및 협죽도의 독성 성분으로 알려진 아코니틴은 전압 의존성 나트륨 채널을 지속적으로 활성화로 인한 심장과 신경계 독성으로 인한 사망을 유발하는데 피부의 변화를 일으킬 기전이 없으며[23], 실제 본 연구진이 수행한 아코니틴 중독으로 사망한 이틀 후 발견된 48세 남성의 시신의 사후 검사에서도 피부의 변색은 전혀 관찰되지 않았다(Fig. 1). 아코니틴 사망자 국제 보고에서도 피부의 변색 등의 소견은 보고된 바 없다[24,25].

Fig. 1.

No evidence of cutaneous discoloration in the remains of a 48-year-old male identified two days postmortem following aconitine intoxication.

전통적으로 중독에 의한 사망자의 피부가 검게 변한다는 믿음이 있었는데, 이는 사망과정에서 질식 기전이 동반되는 청색증을 중독으로 인한 피부 반응으로 여길 가능성이 있으며 또는 비상의 주 성분은 삼산화 비소나 불순물 형태로 섞인 황(S)이 비상독을 검출하기 위해 쓰였던 은수저의 성분인 은(Ag)과 반응할 때 생성되는 황화은(Ag2 S)의 검정색 특성을 보고 비상 중독으로 인한 사망자의 피부 역시 검게 변색한다고 오해하여 생각한 결과일 수도 있다.

결국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소현세자의 사망에 시신의 상태만으로 독물로 인한 중독을 추정하였으나 당시 사용된 독극물로는 시신의 변색을 유발할 수 있다고 볼 수 없다.

한편 조선왕조실록의에서 기재된 소현세자의 시신의 상태를 현대 법의학적 관점에서 다시 살펴보면, 전신이 검은 빛으로 보이는 피부 변색과 코와 입 및 귀 등에서 혈성액(bloody discharge) 소견이 보이는데 이를 부패(decomposition)로 인한 사후 변화의 가능성을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소현세자는 인조 23년인 1649년 4월 26일에 사망하였고 이는 현재의 양력으로 보면 5월 21일에 해당하며 다음날인 양력 기준으로 5월 22일에 입관(入棺) 전 죽은 자의 시신을 닦고 수의를 입히는 장례 절차인 염습 과정에서 시신의 변화가 가능한지를 확인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부패(decomposition)는 사망 후 발생하는 인체의 구조와 구성의 변화로 다양하고 복잡한 생화학적 및 병리학적 과정에 의해 진행되는데 미생물, 특히 부패균이 인체의 복잡한 유기물을 분해하여 단순한 유기화합물로 바꾸는 것을 부패(putrefaction)라 한다[26,27].

일반적으로 부패(putrefaction)는 늦은 사후변화로 알려져 있으며 미생물의 효소-화학적인 변화가 그 주된 기전으로 알려져 있으며 세균(Escherichi coli, Enterococci, Clostridium perfringens 등)과 외부에서 들어온 세균(Bacillus subtilis 등)이 부패균으로 유발된다[26,28].

부패균은 사망 후 사망자의 혈관 안에 있는 혈액을 따라 번식하며 부패균이 스스로 만든 가스 압력으로 번져 나가는데 산소가 적고 수분이 많은 상황에서는 환원작용으로 단백질이나 탄수화물을 분해하여 각종 아미노산, 암모니아 가스, 황화수소(H2 S)가 생기면서 피부의 변색이 발생한다. 일반적으로는 사망한 지 하루나 이틀이 지나면, 주검의 하복부가 어두운 녹색(暗綠色)을 띄게 되며 이 변색은 차차 상복부나 흉부로 번지는데(부패성 변색), 유황을 가진 단백질을 분해하여 발생한 황화수소가 헤모글로빈에 작용하여 황화헤모글로빈(sulfhemoglobin)이나 황화메트헤모글로빈(sulfhmethemoglobin)을 만들기 때문이다[29,30]. 또한 부패에서는 부패균에 의한 작용으로 인한 부패 가스 압력이 높아지면서 파열된 점막 혈관 소견과 함께 부패로 인해 혈액이 용혈하면서 혈색소가 혈관 밖으로 번지면서 코와 입 및 귀 등에서 출혈로 오인할 수 있는 부패 혈성액이 보이는 것은 부검을 담당하는 의사에게는 흔히 경험하는 소견이다.

결국 염습이 사망 다음날에 이루어진 경과를 보면 부패가 하루 만에 발생했는지가 쟁점이 되는데 부패를 촉진하는 조건으로 높은 기온의 노출, 높은 습도, 수포성 피부 병변, 과도한 침구의 덮임의 외부적 요인과 함께 당뇨나 패혈증과 같이 신체 고온에서 사망할 수 있는 질병과 비만 등이 알려져 있으며[26], 실제 미생물이 혈액이나 장기에 이미 존재하는 경우 및 고온의 상태에서는 급속하게 부패가 가속화되는 기전이 알려져 있다[31]. 또한 당뇨 환자에서의 고혈당증 상태에서는 박테리아의 부패 과정에서 발효를 위한 당의 공급이 충분해지면서 부패가 가속화되는 것이 보고되었다[26].

따라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소현세자의 실제 앓고 있던 질병에 의해 부패가 가속화되면서 시신의 변화가 발생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이를 추단하기 위해 소현세자의 질병력과 사망원인의 현대 의학 관점의 추정이 요구된다.

2. 소현세자는 귀국한 후 병증이 확인된 3일 만에 사망하였는가?

소현세자의 독살설에 기반한 논란 중 두 번째 쟁점은 실제 귀국하여 병증이 확인된 후 사흘 만에 사망하였는지 여부이다.

이에 대해 조선왕조실록 인조 15년 1637년 2월 8일 소현세자가 볼모로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갈 당시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서술이 확인된다[32].

무인년(戊寅년, 1638년)에 구왕(九王, 도르곤)이 철병하여 돌아가며, 왕세자와 빈궁(왕세자의 부인), 봉림대군과 그의 부인이 서쪽으로 향했다. 상(왕)은 창릉 서쪽에서 이들을 보내기 위해 행차했다. 길가에 말을 멈추고, 구왕과 서로 인사했다.

구왕이 말하길, “멀리서 와서 배웅해 주시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상(왕)이 말하길, “가르치지 못한 아이들이 지금 따라가려 하니, 대왕께서 가르침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구왕이 말하길, “세자의 나이가 이미 저보다 많은데, 그가 일을 처리하는 것을 보니, 제가 감히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황제가 후하게 대우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상(인조)이 말하길, “여러 아들이 깊은 궁궐에서 자랐는데, 이제 여러 날 동안 노숙을 하여 병이 이미 생겼습니다. 길에서 자지 않도록 방에서 잘 수 있게 해주기를 바랍니다.”

구왕이 말하길, “삼가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만리 길의 이별에 마음을 쓰게 되어, 국왕께서 상심하실까 두렵습니다. 세자가 비록 가지만, 곧 돌아올 것이니, 지나치게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군사들이 매우 바쁘니, 이제 물러가겠습니다.”

세자와 대군이 절을 올리고 떠나며, 상(왕)은 눈물을 흘리며 배웅하며 말하길, “힘내라! 화를 내지 말고, 경솔히 행동하지 말라.”

세자는 엎드려 가르침을 받고, 신하들은 옷자락을 붙잡고 통곡했다. 세자가 이를 말리며 말하길, “주상께서 여기 계시니, 어찌 감히 이럴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나서, “각자 몸을 아끼십시오.”라고 말한 후, 말에 올라 떠났다.

이를 통해 소현세자가 이미 전쟁 중에 피란 생활 당시 노숙으로 인해 병이 생겼다는 기술이 확인된다. 이후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소현세자가 귀국한 이후인 인조 23년인 1645년 4월 23일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었다[33].

어의 박군이 세자를 학질이라고 진찰하다. 세자가 병이 났는데, 어의 박군(朴頵)이 들어가 진맥을 해보고는 학질로 진찰하였다. 약방이 다음날 새벽에 이형익(李馨益)에게 명하여 침을 놓아서 학질의 열을 내리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후 4월 24일과 4월 25일에 동일한 내용의 “세자가 침을 맞다.”가 기재된 후 4월 26일 소현세자의 사망이 기록되었다[34,35].

따라서 조선왕조 실록에 따르면 1964년 김용덕의 논문의 주장대로 학질이라는 진단 3일 후에 사망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학질은 한의학에서 해학(痎瘧)이라고도 하는데, 현대에서는 모기에 의해 전염되는 말라리아를 학질로 추정하고 있으나 실제 조선시대 기록에서는 반복적으로 열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증상이 나타나는 다양한 질병을 학질이라고 기술하였으며 실제 한의학에서도 조선시대의 학질을 말라리아로 국한하지 않는다[5].

그러나 승정원일기를 살피면(Appendix 2),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간 지 1년 후인 인조16년인 1638년 경부터 소현세자의 신체 질병 중 소화기 또는 비뇨기 질환으로 추정되는 산증(疝症)에 대한 기록이 지속적으로 발견되며 특히 1638년 5월 4일에는 산증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확인된다[36].

삼가 박로(朴?) 등의 장계를 보니, 세자의 증후가 가볍지 않은 듯하여 너무도 애가 타고 답답합니다. 유후성(柳後聖)을 장계에서 말한 대로 급히 떠나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그저께 이미 유후성, 정지문(鄭之問) 등이 의약(議藥)하였는데, 증후가 이미 바뀌었으므로 지금은 괴(塊)를 다스리고 음식을 잘 먹게 하는 탕제를 써야 합니다. 이에 상당하는 약재를 먼저 파발로 내려 보내서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하여금 따로 군관을 정해 주야로 달려가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감히 아룁니다.

이 기재에 따르면 이미 소현세자는 배종의관(陪從醫官)으로부터 치료를 받은 기록이 있으며 이후에도 인조 18년(1640년), 인조 22년(1644년)에 지속적으로 소현세자의 발열과 설사 등의 증상과 치료에 대한 기록이 승정원일기에서 확인된다(Appendix 2). 특히 영구 귀국하여 한양에 도착한 당일인 인조 23년(1645년) 2월 20일의 기록은 다음과 같이 확인된다[37].

의약할 수 있도록 세자 병증의 기록을 내려 줄 세자를 간병한 결과를 보고하는 약방 도제조 영의정 김류 등의 계

세 번째 아뢰기를,

“전교하셨습니다. 의관들로 하여금 세자의 증후를 알아보게 하였더니, ‘전에 앓던 여러 증세들은 거의 회복되었으나 기침이 나고 숨이 차고 침이 탁하고 번갈이 나고 음식 맛을 모르는 증세는 여전히 다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외감(外感)은 비록 풀렸으나 위(胃)의 열이 아직 남아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모영수탕(二母寧嗽湯)에 지골피(地骨皮)와 맥문동(麥門冬)을 각 1돈씩 가미하여 5첩을 연달아 복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대로 지어 올리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 《약방일기》에 의거함 –

이 기록을 살피면 소현세자는 지속적으로 기침과 호흡곤란 및 침이 탁한 호흡기 증상과 갈증이 심해 다량의 물이 마시고 싶은 목마름 증상인 다갈증(polydipsia)의 용어인 번갈(煩渴) 등이 기재되었다.

영구 귀국 사흘 후인 인조 23년(1645년) 2월 24일의 기록에서도 기침, 호흡곤란, 어지럼증, 목마름 등이 기록되었다[38].

종합하면 소현세자는 영구 귀국 이후에 기침, 호흡곤란, 어지럼증에 동반된 목마름증(hydrodipsomania) 및 메스꺼움(nausea) 등의 증상이 확인되었고 이에 당시 폐렴으로 해석되는 전통적인 용어인 폐열(肺熱)로 인한 기침과 가래, 열감 등의 증상을 치료하기 위해 사용된 이모영수탕(二母寧嗽湯)이 처방되었다. 이후에도 발열, 열감, 기도 감염 등에 처방된 한약인 시호연교탕(柴胡連翹湯) 등이 처방되었으나 계속적으로 기침 등의 호흡기 증상과 발열과 오한이 호전과 악화가 반복되었고 식후의 혼곤증(昏困症)이 지속되어 이를 학질로 진단하여 치료하였으나 인조 23년(1645년) 4월 26일 소현세자는 사망하였다. 결국 승정원 일기에 따르면, 소현세자는 귀국 전부터 비뇨기 또는 소화기 및 호흡기 질환으로 추정되는 증상으로 치료받은 기록이 다수 확인된다. 이 외에도 심양일기(Appendix 3), 소현을유동궁일기(Appendix 4) 및 심양장계(Appendix 5)를 살펴봐도 귀국 전부터 비뇨기 또는 소화기 및 호흡기 질환으로 추정되는 증상의 병력이 확인된다. 결국 소현세자가 영구 귀국한 인조 23년(1645년) 2월 20일 이후에도 이와 같은 기존의 질병 증상이 지속되면서 호전과 악화를 반복하였고 이에 대한 치료를 받다가 사망한 사실을 본다면 소현세자가 귀국한 후 병증이 확인된 사흘 만에 사망하였다고 볼 수는 없으며 기왕증의 상태가 지속되다가 사망하였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3. 현대의학 관점에서 소현세자의 질환과 사망원인은 무엇으로 추정할 수 있는가?

Table 1에서 제시한 문헌(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심양일기, 소현을유동궁일기 및 심양장계)에 따른 소현세자의 주요 일정과 신체 증상과 치료력에 대한 연대표를 살피면, 소현세자는 인조 15년 1637년 피란 생활에서 노숙으로 병이 들어있다는 기재 이후 1637년 심양에 도착 후 평소에 건강이 좋지 않았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이후 1637년 5월 15일 곽란(霍亂: 더위를 먹거나 그 밖의 일로 심하게 토사하는 급성 위장염)이 발생하였고 이후 1638년 4월 18일경 산증(疝症)으로 배종의관에 의해 동의보감에 근거한 침과 뜸 치료가 시행되었다. 일반적으로 한의학에서 산증이란 복강의 내용물이 밖으로 돌출되거나 생식기 부위의 통증 또는 복부의 극렬한 통증과 함께 대소변이 제대로 배출되지 않는 증상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비뇨기 증상이나 생식기 또는 소화기의 통증 등의 증상을 아우르는 단어로 해석된다. 이후 1638년 눈병과 함께 산증이 심해지면서 1638년 인조 16년 6월 1일에 청나라에 배종의관인 유후성이 도착하여 침으로 치료받은 병력이 있으며 다음해인 1649년 기록에도 산증이 지속되며 미각 상실(ageusia)과 생식기 주변에 ‘딱딱한 돌기’가 확인되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 생활 3년 차인 1640년 9월 12일 기록에서 목이 타고 마르는 증상에 동반된 오른쪽 마비 증상이 발생하여 발열과 염증 완화에 전통 한의학에서 처방되었던 퇴열탕(退熱湯)을 음용하였으나 증상이 지속되어 10월 16일 조선에 침구 치료를 취한 침의 박태원을 보내 달라고 청해 실제 다음해인 1641년 10월 16일 박태원이 청나라에 도착한 기록이 심양일기에서 확인된다. 소현세자는 1641년까지 반신 마비가 지속된 것으로 보이며 기침과 천식이 지속되며 오한과 오심과 음식에 대한 미각상실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었다. 1641년 5월 20일에는 더위를 견딜 수 없고 자주 갈증을 느끼는 증상이 기재되었고 오른쪽 눈에 백태가 끼며 붉어지는 통증이 있었고 연말에는 다시 왼쪽 눈에 눈병이 났다고 기록되었다. 이후에도 1642년 오심과 구역감과 복부 통증이 지속되며 어지럼증이 심해지는 증상이 확인된다. 1643년에는 오한과 열감에 동반된 어지럼증과 입이 마르는 증상이 지속적으로 기록되며 대부분 감기로 판단하여 치료를 하였다. 이러한 기록을 보건대 소현세자의 약 8년여간의 청나라 생활에서 주요하게 기록된 증상 또는 질환은 산증(疝症), 기침과 천식 및 발열로 기재된 호흡기 증상, 어지럼증, 오른쪽 반신마비, 미각상실, 구강 건조, 눈병 등이다. 소현세자가 완전 귀국한 이후의 승정원일기(Appendix 2)에 자세히 기록된 증상은 발열, 기침, 호흡곤란, 침이 탁하고, 목마름, 미각상실, 식후 혼곤증, 복통, 어지럼증 등이 기록되었고 주로 호흡기 증상이 보이며 사망에 이르렀다. 이러한 소현세자의 지속적인 병력의 기록을 보면, 호흡기, 소화기 및 대사성 질환의 증상을 추정할 수 있으며 귀국 이후에는 학질로 최초 진단되었던 발열을 동반한 호흡기 질환이 지속되면서 호전과 악화를 반복하였고 마지막 6일 동안은 전통적으로 감기, 독감, 또는 다른 급성 발열 질환을 지칭하는 용어인 상한(傷寒)이 지속되었음이 소현을유동궁일기에 기록된 바 폐렴으로 인한 패혈증(sepsis)으로 사망하였을 가능성을 우선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Table 1). 이후 소현세자의 시신에서 관찰된 피부 변색을 동반한 코, 입, 귀 등의 혈성액 유출의 조기 부패로 추정되는 소견을 종합한다면 앞서 언급한대로 패혈증이 직접사인으로 작용하였다고 보이며 그 선행사인으로 폐렴의 가능성을 추정하고, 최종 선행사인인 원사인으로는 자가면역질환이나 대사성 질환을 추정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특히 그의 호흡기나 소화기 그리고 비뇨기 등의 전신증상이 동반된 지속적인 목마름, 식후 혼곤증 등과 함께 조기 부패 소견을 보면 자가면역질환인 성인 발병 자가면역성 당뇨병(latent autoimmune diabetes in adults)을 원사인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드물지만 증상에 기반한다면 남성 쇼그렌 증후군(Sjö gren's syndrome)의 가능성 역시 추정해 볼 수 있다. 다만 현대 의학의 검사 소견 없이 실제 의학적 진단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문헌만으로는 적확한 질병의 추정은 불가하다.

Timeline of Crown Prince Sohyeon's major activities, major physical symptoms, and treatments based on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the Diary of the Royal Secretariat, the Diary of Simyang, the Diary of Sohyeon's Journey to Yonggung, and the Simyang Janggye

고 찰

본 연구에서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심양일기, 소현을유동궁일기 및 심양장계의 문헌 분석을 통해 소현세자가 약 8년의 청나라의 볼모 생활 중 다양한 증상을 보이는 질병으로 치료를 받은 병력을 확인하였으며 귀국 후에도 지속적인 질병으로 인해 치료를 받다가 사망하였다고 판단하였고 시신의 상태에 따른 독살의 가능성을 배제하였다. 문헌 고찰을 통한 분석으로 소현세자의 직접 사망원인으로 패혈증, 선행원인으로 폐렴, 최종 선행사인인 원사인으로는 자가면역질환 또는 대사성 질환으로 추정하며 사망의 종류는 질병사로 판단하였다. 이러한 추론은 소현세자에 대한 직접적 부검이 시행되지 않은 상황이며 전통 의학적 기록 및 역사 기록을 현대 의학의 직접적인 해석과 적용에 적확성의 한계가 분명히 존재한다. 다만 기록의 국가 조선의 세자였던 소현세자에 대한 다수의 문헌이 존재하는 만큼 사망원인에 대한 합리적인 의학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보며 본 연구가 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판단하며 향후 본 연구를 시작 점으로 우리나라 전통 역사적 인물에 대한 과학적 접근이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Notes

Conflicts of Interest

No potential conflict of interest relevant to this article was reported.

Acknowledgments

I would like to thank writer Byeol-i Hwang for her assistance in organizing the data for this stu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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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ndix

Appendix 1. The illness history and death of Crown Prince Sohyeon according to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https://sillok.history.go.kr/search/inspectionMonthList.do?id=kpa)

Appendix 2. The illness history and death of Crown Prince Sohyeon according to the Diary of the Royal Secretariat

Appendix 3. The illness history and death of Crown Prince Sohyeon according to the Simyang Diary

Appendix 4. The illness history and death of Crown Prince Sohyeon according to the Sohyeon's Journey to Yonggung Diary

Appendix 5. The illness history and death of Crown Prince Sohyeon according to the Simyang Janggye

Article information Continued

Fig. 1.

No evidence of cutaneous discoloration in the remains of a 48-year-old male identified two days postmortem following aconitine intoxication.

Table 1.

Timeline of Crown Prince Sohyeon's major activities, major physical symptoms, and treatments based on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the Diary of the Royal Secretariat, the Diary of Simyang, the Diary of Sohyeon's Journey to Yonggung, and the Simyang Janggye

Timeline Events and health conditions
The 15th year of King Injo's reign, 1637 February 8
  Crown Prince Sohyeon was taken as a hostage to Shenyang, Qing China (Including Lady Kang Minhoe and Prince Bongrim, departure on 2/8 and arrival in Shenyang on 4/10)
  Before parting with the Crown Prince, King Injo expressed that his son had already fallen ill from living in exile and requested that he be allowed to sleep in a heated room (Annals of King Injo, Year 37, February 8).
April 10
  Arrival in Shenyang
  Lived with over 500 people in the Shenyang Hall (mentioned in the first part of the Diary of Simyang)
  Subsequently, Crown Prince Sohyeon, who had always been in poor health (and also Lady Kang), showed signs of illness
May 15
  The Crown Prince suffered from gwa-ran (霍亂), an acute gastroenteritis characterized by severe vomiting and diarrhea, often due to heatstroke or other causes.
The 16th year of King Injo's reign, 1638 February 22
  The Crown Prince developed an eye disease and received a medical examination.
  Subsequent records show that he received acupuncture seven times until March 9.
April 18
  On April 16, the Crown Prince experienced symptoms of gwa-ran (霍亂).
  He received acupuncture at the Taechong acupoint and moxibustion at the Daedon acupoint (five units).
  The next day, he received seven units of moxibustion at the Daedon acupoint, but his condition worsened, and he experienced severe pain (noted in the Diary of Simyang).
April 26
  Due to the lack of improvement in the Crown Prince's health, a request was sent to Joseon for a medical envoy.
June 1
  The medical envoy sent from Joseon arrived.
  The records indicate that the envoy did not immediately begin treatment but started administering acupuncture from June 11.
The 17th year of King Injo's reign, 1639 March 16
  Crown Prince Sohyeon, having not fully recovered from last summer's sanjeung (mountain sickness) and the persistent cold abscess under his ribs, was ordered to receive moxibustion again (starting from the 17th).
June 13
  Crown Prince Sohyeon, having lost his sense of taste for a long time, was ordered to take medication.
The 18th year of King Injo's reign, 1640 January 22
  A small, red, and hard nodule appeared near Crown Prince Sohyeon's lower abdomen, and it was decided to use acupuncture for prevention.
February 13
  Crown Prince Sohyeon departed from Shenyang after receiving permission from the Qing Emperor to return to Joseon temporarily upon hearing of King Injo's illness. The Emperor agreed on the condition that the Crown Prince's son would be exchanged as a hostage during his absence.
March 7
  Crown Prince Sohyeon arrived in Seoul.
  He was greeted by the citizens and palace officials. The streets were filled with people weeping until he reached the palace gates.
  A tearful reunion with King Injo took place at Changdeok Palace's Yanghwadang (Annals of King Injo, Year 18, March 7).
April 2
  Crown Prince Sohyeon returned to Shenyang (arriving on May 15).
July 16
  The authorities in Shenyang granted permission for Crown Prince Sohyeon's eldest son to be sent back to Joseon.
September 12
  The Crown Prince experienced symptoms of dry throat and paralysis on the right side. The royal physicians deliberated and prepared Taeyultang (退熱湯) to reduce the fever.
October 16
  Observing the Crown Prince's symptoms, it was deemed necessary to perform acupuncture therapy. The court dispatched acupuncturist Park Tae-won to Shenyang to provide the treatment (Park Tae-won is later mentioned in the Simyang Diary on March 5 of the following year).
The 19th year of King Injo's reign, 1641 January 24
  It was finally decided to use acupuncture for the Crown Prince's paralysis symptoms.
February 17
  Crown Prince Sohyeon experienced headache, fluctuating fever, loss of voice, cough, and asthma starting the previous night. A decoction was prepared to treat these symptoms.
February 18
  Although there was some improvement from the previous day, the Crown Prince still had a headache when coughing or experiencing shortness of breath, chest discomfort, chills, nausea, and sudden aversion to food.
  Sosihotang (小柴胡湯) was prepared and administered.
February 20
  The Crown Prince's condition improved, and he was advised not to worry about court affairs.
May 20
  The Crown Prince felt unable to tolerate the heat and frequently experienced thirst.
November 17
  The Crown Prince noticed a stinging sensation in his right eye early in the morning.
  On November 20, he experienced pain in his left eye.
  Related reports were submitted until November 27.
The 20th year of King Injo's reign, 1642 March 13
  The Crown Prince experienced nausea and a sensation of wanting to vomit due to weakened stomach and spleen, along with coldness in both legs.
  He mentioned having fallen off a horse on January 1, which might be the cause of these symptoms.
March 17
  Despite taking medication, the Crown Prince felt severe abdominal pain and tightness under the ribs.
  Improvement was noted starting from the 21st, and he was able to receive visitors again.
September 13
  The Crown Prince reported feeling cold and shivery throughout his body, as if wind had entered his head, and he experienced a significant increase in dizziness that he had suffered from previously.
The 21th year of King Injo's reign, 1643 December 12
  The Crown Prince requested medication because he felt his qi () was uneven, experienced chills, and had lost his voice.
  By midday, his symptoms had worsened, presenting with chills, fever, dizziness in the head and eyes, and dry mouth requiring frequent water intake. These symptoms were attributed to catching a cold due to exposure to cold wind.
The 22th year of King Injo's reign, 1644 January 20
  Crown Prince Sohyeon and Lady Kang temporarily returned to Joseon to pay respects following the death of Lady Kang's father and to check on King Injo's health.
  Many people from the capital came out to greet them.
February 19
  Crown Prince Sohyeon and Lady Kang returned to Shenyang.
March 12
  Due to concerns over the Crown Prince's severe cold symptoms, the court proposed sending a young royal physician along with medicinal decoctions.
  The unification of China by the Qing Dynasty (Beijing occupation).
  Crown Prince Sohyeon moved to Beijing.
The 23rd year of King Injo's reign, 1645: Complete Return January 4
  Lee Hyung-ik was specially appointed due to his skill in acupuncture known as ‘beonchim,’ which was highly favored by King Injo.
  However, records indicate that there were rumors of his frequent visits to the home of Jo So-yong's mother, causing scandal (Annals of King Injo, Year 23, January 4).
February 18
  Crown Prince Sohyeon and Lady Kang Minhoe returned to Joseon permanently.
  They returned with Qing envoys, and King Injo was asked to meet them outside the capital. King Injo initially refused due to health reasons but eventually met them in the palace courtyard.
  The people were greatly disappointed as the Crown Prince brought back many goods from Beijing instead of items of greater significance (Annals of King Injo, Year 23, March 9).
  King Injo prohibited the customary ceremonies and offerings of gifts to the Crown Prince, considering them inappropriate (Annals of King Injo, Year 22, December 6).
February 20
  Symptoms appeared due to the Crown Prince's journey, and the Minister of State requested to document his illness.
  Initial symptoms recorded in the Diary of the Royal Secretariat: cough, shortness of breath, thick phlegm, thirst, loss of taste, and residual stomach heat.
February 24
  The Crown Prince's symptoms of cough, shortness of breath, and dizziness worsened.
  Continued to experience dry mouth and bitter taste. Sweat symptoms eased, and food intake slightly increased. Symptoms were considered to be caused by phlegm and emotional distress.
February 26
  The Crown Prince had a fever due to a recent cold, and all other symptoms were also related to the fever.
  Lee Hyung-ik was additionally involved.
February 29
  The fever mostly subsided, but cold symptoms remained.
  Symptoms of phlegm rising to the mouth, cough, nausea, and acid reflux persisted.
March 1
  Sosihotang (小柴胡湯) seemed to have a positive effect.
  Residual cold symptoms still present.
March 5
  Multiple pre-existing symptoms reduced by two-thirds, and complexion improved.
  Bitter taste in the mouth indicated residual liver heat.
March 6
  Approval was granted to administer acupuncture to the Crown Prince.
March 10
  Symptoms of dizziness, shortness of breath, nausea, and acid reflux from the previous day improved, but the cough persisted.
  The Crown Prince felt lethargic and sleepy, indicating external heat had subsided but phlegm and stomach deficiency remained.
  Originally planned three acupuncture sessions were increased to five.
March 14
  The Crown Prince was almost recovered, with only a slight fever remaining.
  Acupuncture and medication were discontinued.
March 18
  Symptoms of asthma, chest tightness, and mental fog worsened in recent days.
  Diagnosed as lung heat; treatment focused on clearing heat and reducing lung inflammation.
April 1
  Persistent severe asthma and cough.
  Developed an itchy rash on the lower right leg.
The 23rd year of King Injo's reign, 1645: Complete Return April 11
  Almost fully recovered.
  Still experienced cough and post-meal fatigue.
April 15
  King Injo ordered that the Crown Prince be given milk porridge every other day.
April 16
  Recent illnesses nearly recovered.
  Occasionally experienced dizziness due to headaches, post-meal fatigue, abdominal discomfort, rib tension, and general heaviness.
  Diagnosed as a spleen and stomach deficiency with exacerbated phlegm.
April 23
  Diagnosed with ‘hague (malaria)-like’ symptoms.
  Symptoms included chills in the evening, similar to those on the nights of the 21st and 22nd.
  Evening chills eventually subsided, but fever and mental confusion persisted.
  Experienced insomnia and increased thirst, with labored breathing.
  Planned to administer acupuncture the next morning to reduce fever and assess symptoms for further medication.
  Lee Hyung-ik offered to administer acupuncture.
April 24
  Only a report of the previous day's symptoms is recorded.
  "On the night of the 21st, the Crown Prince suddenly experienced severe chills, which subsided over time. On the 22nd, the weather was normal. However, on the 23rd, around mid-morning, the chills returned with such intensity that even wearing multiple layers of warm clothing could not alleviate the cold. It wasn't until the evening that the chills subsided, but he continued to suffer from fever and mental confusion. After taking Cheongsimwon (a traditional Korean herbal medicine), his condition slightly improved. Nonetheless, the fever persisted, causing restlessness throughout the night, and he could not sleep due to intense thirst that was unrelieved by fresh water. He also experienced severe and labored breathing, making it difficult for him to lie down comfortably.
  Consulting with court physicians Yu Huseong and Park Gun, they recommended initially administering three doses of Sihojimotang (a traditional herbal medicine) with additional ingredients: one don each of roasted Gardenia jasminoides with the peel and Coptis chinensis soaked in ginger juice, and five pun of Phellodendron amurense soaked in salt water. They advised monitoring the symptoms after the initial treatment to decide further measures."
April 25
  Prolonged symptoms of what was thought to be a common cold.
  April 26 - Death of Crown Prince Sohyeon
  Symptoms of the common cold did not subside for six days.
  King Injo ordered only his two personal physicians to attend to him, with all other royal physicians to be on standby at the Crown Prince's palace.
  The Crown Prince passed away at noon.
  King Injo ordered the coffin to be prepared three days after his death.
인조 15년(1637)
2월 8일이별 구왕이 철군하면서 왕세자와 빈궁, 봉림 대군과 부인을 데려가자 전송하다
구왕(九王)이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면서 왕세자와 빈궁, 봉림 대군과 부인을 서쪽으로 데리고 갔다. 상이 창릉(昌陵)의 서쪽에 거둥하여 전송하였다. 길 곁에 말을 머물게 하고 구왕과 서로 읍(揖)하니, 구왕이 말하기를, “멀리 오셔서 서로 전송하니 실로 매우 감사합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가르치지 못한 자식이 지금 따라가니, 대왕께서 가르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구왕이 말하기를,
“세자의 연세가 벌써 저보다 많고, 일에 대처하는 것을 보건대 실로 제가 감히 가르칠 입장이 못 됩니다. 더구나 황제께서 후하게 대우하시니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자식들이 깊은 궁궐에서만 생장하였는데, 지금 듣건대 여러 날 동안 노숙(露宿)하여 질병이 벌써 생겼다 합니다. 가는 동안에 온돌 방에서 잠을 잘 수 있게 하면 다행이겠습니다.”
하자, 구왕이 말하기를, “삼가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만리 길을 떠나 보내니 필시 여러모로 마음을 쓰실텐데 국왕께서 건강을 해칠까 매우 두렵습니다. 세자가 간다 하더라도 틀림없이 머지않아 돌아올 것이니, 행여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군대가 갈 길이 매우 바쁘니 하직했으면 합니다.”하였다.
세자와 대군이 절하며 하직하고 떠나자, 상이 눈물을 흘리며 전송하기를, “힘쓰도록 하라. 지나치게 화를 내지도 말고 가볍게 보이지도 말라.” 하니, 세자가 엎드려 분부를 받았다. 신하들이 옷자락을 당기며 통곡하자, 세자가 만류하며 말하기를, “주상이 여기에 계신데 어찌 감히 이렇게들 하는가.”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각자 진중하도록 하라.” 하고, 마침내 말에 올라 떠났다.
https://sillok.history.go.kr/search/inspectionDayList.do?id=kpa_115020&did=kpa_11502008
인조 23년(1645)
4월 23일(46권) 어의 박군이 세자를 학질이라고 진찰하다
세자가 병이 났는데, 어의 박군(朴頵)이 들어가 진맥을 해보고는 학질로 진찰하였다. 약방이 다음날 새벽에 이형익(李馨益)에게 명하여 침을 놓아서 학질의 열을 내리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https://sillok.history.go.kr/search/inspectionDayList.do?id=kpa_123040&did=kpa_12304023
4월 24일 세자가 침을 맞다
https://sillok.history.go.kr/search/inspectionDayList.do?id=kpa_123040&did=kpa_12304024
4월 25일 세자가 또 침을 맞다.
https://sillok.history.go.kr/search/inspectionDayList.do?id=kpa_123040&did=kpa_12304025
4월 26일 왕세자의 졸기
왕세자가 창경궁(昌慶宮) 환경당(歡慶堂)에서 죽었다.
세자는 자질이 영민하고 총명하였으나 기국과 도량은 넓지 못했다. 일찍이 정묘 호란 때 호남에서 군사를 무군(撫軍)할 적에 대궐에 진상하는 물품을 절감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제거하려고 힘썼다. 또 병자 호란 때에는 부왕을 모시고 남한 산성에 들어갔는데, 도적 청인(淸人)들이 우리에게 세자를 인질로 삼겠다고 협박하자, 삼사가 극력 반대하였고 상도 차마 허락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세자가 즉시 자청하기를,
“진실로 사직을 편안히 하고 군부(君父)를 보호할 수만 있다면 신이 어찌 그곳에 가기를 꺼리겠습니까.”
하였다. 그들에게 체포되어 서쪽으로 갈 적에는 몹시 황급한 때였지만 말과 얼굴빛이 조금도 변함 없었고, 모시고 따르던 신하들을 대우하는 데 있어서도 은혜와 예의가 모두 지극하였으며, 무릇 질병이 있거나 곤액을 당한 사람이 있으면 그때마다 힘을 다하여 구제하였다.
그러나 세자가 심양에 있은 지 이미 오래되어서는 모든 행동을 일체 청나라 사람이 하는 대로만 따라서 하고 전렵(田獵)하는 군마(軍馬) 사이에 출입하다 보니, 가깝게 지내는 자는 모두가 무부(武夫)와 노비들이었다. 학문을 강론하는 일은 전혀 폐지하고 오직 화리(貨利)만을 일삼았으며, 또 토목 공사와 구마(狗馬)나 애완(愛玩)하는 것을 일삼았기 때문에 적국(敵國)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크게 인망을 잃었다. 이는 대체로 그때의 궁관(宮官) 무리 중에 혹 궁관답지 못한 자가 있어 보도하는 도리를 잃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세자가 10년 동안 타국에 있으면서 온갖 고생을 두루 맛보고 본국에 돌아온 지 겨우 수개월 만에 병이 들었는데, 의관(醫官)들 또한 함부로 침을 놓고 약을 쓰다가 끝내 죽기에 이르렀으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슬프게 여겼다. 세자의 향년은 34세인데, 3남 3녀를 두었다.
대신이 왕세자의 상에 대해 사관을 보내 실록을 상고해 올 것을 청하다
대신이 아뢰기를, “왕세자의 상을 뜻밖에 당하여 딴 데는 상고할 만한 문서가 없으니, 급히 사관(史官)을 강도(江都)에 보내어 《실록(實錄)》에서 상고해 오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입관(入棺)한 후의 상례에 대해서 의당 실록에 의거해서 해야겠지만 입관 이전의 상례에 대해서는 《실록》을 상고해 오기를 기다릴 수 없으니, 3일 만에 입관하는 것이 옳다.”
하니, 대신이 그럴 수 없다고 쟁론하므로, 상이 이르기를,
“3일 만에 입관하는 것은 사대부와 똑같은데, 무슨 해로울 것이 있겠는가.”하였다.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도 아픔을 참고 세자의 상에 임하다
이때 상의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도 억지로 아픔을 참고 세자의 상에 임하므로 영상 김류와 좌상 홍서봉이 세 번이나 아뢰어 대내(大內)로 환궁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자 대신이 곧바로 문정전(文政殿) 안에 들어가 굳이 청하니, 상이 그제야 따랐다.
https://sillok.history.go.kr/search/inspectionDayList.do?id=kpa_123040&did=kpa_12304026
4월 27일 염습을 마치고 습전을 베풀다
염습(斂襲)을 마치고 습전(襲奠)을 베풀었는데, 시강원·익위사 및 정원·옥당이 함께 문정문(文政門) 밖에 나아가 배곡례(拜哭禮)를 행하였고, 종친·백관 등은 집현문(集賢門)에서 배곡하였다.
양사(사헌부/사간원/홍문관 합)가 왕세자의 치료를 담당한 의원 이형익 등을 국문할 것을 청하다양사가 아뢰기를,
“왕세자의 증후(症候)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악화되어 끝내 이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뭇사람의 생각이 모두 의원들의 진찰이 밝지 못했고 침 놓고 약 쓴 것이 적당함을 잃은 소치라고 여깁니다. 의원 이형익(李馨益)은 사람됨이 망령되어 괴이하고 허탄한 의술(醫術)을 스스로 믿어서 일찍이 들어가 진찰하던 날에 망령되이 자기의 소견을 진술했는데, 세자께서 한전(寒戰)이 난 이후에는 증세도 판단하지 못하고 날마다 침만 놓았으니, 그 신중하지 않고 망령되게 행동한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형익을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고 증후를 진찰하고 약을 의논했던 여러 의원들도 아울러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여러 의원들은 신중하지 않은 일이 별로 없으니, 굳이 잡아다 국문할 것 없다.”
하였다. 재차 아뢰었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https://sillok.history.go.kr/search/inspectionDayList.do?id=kpa_123040&did=kpa_12304027
5월 2일 합계하여 다시 이형익·박군 등의 죄를 논하다
합계하여 다시 이형익(李馨益)·박군(朴頵)·유후성(柳後聖) 등의 죄를 논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https://sillok.history.go.kr/search/inspectionDayList.do?id=kpa_123050&did=kpa_12305002
6월 12일 양사가 이형익 등을 국문하여 죄를 정할 것을 청하다
양사가 합계하기를, “삼가 보건대 약방(藥房)의 계사(啓辭) 가운데 ‘자시(子時)와 해시(亥時) 사이에 뜸질을 하여 사람들이 모르게 하라.’는 말이 있어 매우 놀라움을 이길 수 없습니다. 성상의 옥체에 뜸질을 하는 일이 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일개 요사스러운 의원의 말만을 인하여 시험할 수 없는 일을 이와 같이 행한단 말입니까. 뭇 신하들이 모두 걱정하고 두려워하니, 한밤중에 뜸질하라는 명을 정지하소서.
이형익(李馨益) 등을 잡아다 국문하라는 청은 온 나라의 공론에서 나온 것인데, 한 달이 지나도록 서로 버티기만 하고 윤허를 내리지 않으시면서 도리어 신자(臣子)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씀을 하교하시니, 성명께서 신하들을 대우하는 도리가 이처럼 야박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시질(侍疾)하다가 상고(喪故)를 당하고 나면 시질했던 자를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는 것에는 상전(常典)이 분명하게 있습니다. 법을 집행하는 신하들이 따지는 것은 오직 법뿐입니다. 이형익 등을 속히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도록 명하소서.”하고, 옥당도 차자를 올려 논쟁하였으나,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이형익의 번침이 효과가 있어 총애를 받아 밤중에 요안혈에 뜸질하다
밤중에 상이 요안혈(腰眼穴)에 뜸질을 하였는데, 이형익 혼자서 환관 한 사람과 함께 입시하였고, 약방 및 승지 사관은 모두 감히 들어가지 못하였다. 이에 앞서 상이 오랫동안 질병을 앓던 중 대궐 안에 마침 저주의 변고가 있자, 이형익이 사악한 빌미를 다스릴 수 있다는 이유로 번침(燔鍼)을 놓아드렸는데, 이것이 약간 효과가 있어 마침내 총애를 받아서 상사(賞賜)한 것을 이루 다 기록할 수도 없었다.
이형익은 어리석고 도리에 어긋난 위인으로서 스스로 상의 뜻을 얻었다고 여겨, 무릇 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마다 은밀히 상께 말하여 그의 형제와 자식이 모두 음직(蔭職)을 외람되이 차지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를 분개하게 여겼다. 이때에 이르러 이형익이 혼자서 뭇사람의 의논을 물리치고 망령되이 요안혈에 뜸질을 하였는데, 상은 그의 의술에 미혹되어 매양 번침을 맞을 때마다 ‘효험이 있다.’고 말씀하였으므로, 뭇 신하들이 모두 감히 극력 논쟁하지 못했다.
https://sillok.history.go.kr/search/inspectionDayList.do?id=kpa_123060&did=kpa_12306012
6월 15일 왕세자의 재궁을 발인하다
왕세자의 재궁을 발인하여 창경궁(昌慶宮) 빈양문(賓陽門)을 나와 명정문(明政門)동협(東夾)142) 을 거쳐 소여(小轝)에 싣고, 홍화문(弘化門) 동협을 나와 대여(大轝)에 실은 다음 숭례문(崇禮門)을 경유해서 나왔는데, 종친부·익위사·시강원의 관속 및 각사의 당상과 낭관이 한 사람씩 차례로 배종(陪從)하였다. 재추(宰樞)143) 와 백관 및 유생들은 먼저 노제소(路祭所)로 나아가 길가에 차례대로 늘어서 있다가 재궁을 맞아 재배하고 곡하며 하직하였다. 대궐 안에 입직한 여러 관원들은 모두 궐문 안에서 재배하고 곡하며 하직하였고, 입직한 장사(將士)들은 각기 입직 장소에서 발인하는 쪽을 바라보며 곡하였다.
https://sillok.history.go.kr/search/inspectionDayList.do?id=kpa_123060&did=kpa_12306015
6월 19일 소현 세자를 고양에 장사지내다
소현 세자를 고양(高陽)에 장사지내고 인경궁(仁慶宮)의 혼궁(魂宮)으로 반우(返虞)하였다.
https://sillok.history.go.kr/search/inspectionDayList.do?id=kpa_123060&did=kpa_12306019
6월 27일 소현 세자의 졸곡제를 행하다
소현 세자의 졸곡제(卒哭祭)를 행하였다. 전일 세자가 심양에 있을 때 집을 지어 단확(丹艧)을 발라서 단장하고,또 포로로 잡혀간 조선 사람들을 모집하여 둔전(屯田)을 경작해서 곡식을 쌓아 두고는 그것으로 진기한 물품과 무역을 하느라 관소(館所)의 문이 마치 시장 같았으므로, 상이 그 사실을 듣고 불평스럽게 여겼다.
그런데 상의 행희(幸姬) 조 소용(趙昭容)은 전일부터 세자 및 세자빈과 본디 서로 좋지 않았던 터라, 밤낮으로 상의 앞에서 참소하여 세자 내외에게 죄악을 얽어 만들어서, 저주를 했다느니 대역부도의 행위를 했다느니 하는 말로 빈궁을 무함하였다.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目)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 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藥物)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외인(外人)들은 아는 자가 없었고, 상도 알지 못하였다.
당시 종실 진원군(珍原君) 이세완(李世完)의 아내는 곧 인열 왕후(仁烈王后)의 서제(庶弟)였기 때문에, 세완이 내척(內戚)으로서 세자의 염습(斂襲)에 참여했다가 그 이상한 것을 보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한 것이다. https://sillok.history.go.kr/search/inspectionDayList.do?id=kpa_123060&did=kpa_12306027
인조 16년(1638)
5월 2일심양에서받은 장계에따른 보고 세자의 신병에 대해 의약한 결과를 보고하는 약방의 계
약방이 아뢰기를, “세자의 증후에 대해 의원들과 논의해 보니, 신득일(申得一), 이락(李絡), 견후민(堅後閔) 등은 오령산(五苓散)에 삼산탕(三疝湯)을 합하고, 거기에 천련자(川鍊子)·치자초(梔子炒) 각 1전(錢), 청피(靑皮)·황련초(黃連炒)·감초초(甘草梢) 각 5푼(分)을 첨가해서 써야 한다고 하였고, 유후성(柳後聖), 정지문(鄭之問) 등은 오부통기탕(烏附通氣湯)에 강제(薑製)한 후박(厚朴) 4푼, 시호(柴胡)·승마(升麻)·청피 각 3푼과 주초(酒炒)한 황금(黃芩)·맥문동(麥門冬) 각 5푼을 써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두 처방의 기본 약재는 대체로 같습니다만, 좌사약(佐使藥)이 조금 다릅니다. 멀리 떨어져 있어 증후를 상세히 알 수 없으므로, 두 처방의 약재를 가공하지 않은 채로 모두 들여보내 증상을 봐서 골라 쓰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문정전 월랑에서 좌의정 최명길 등을 인견할 때 우부승지 김광욱 등이 입시하여 청나라가 요구하는 군병과 군량을 보내는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심열이 아뢰기를, “최근에 심양(瀋陽)의 의관이 보낸 서계를 보니, 세자에게 편치 않은 증후가 있다고 합니다. 이미 약간의 약재를 들여보내기는 하였지만 지금 너무도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산증(疝症)은 치료할 수 있는 방도가 없는가?”
하자, 최명길이 아뢰기를, “이는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 아닙니다. 정지문과 상의하여 약을 조제해 들여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P0_A16_05A_02A
5월 4일 세자의 신병이 가볍지 않은 듯하므로 유후성을 급히 떠나보낼 것 등을 청하는 내의원 도제조의 계민응형이 내의원 관원이 전하는 도제조의 뜻으로 아뢰기를,
“삼가 박로(朴?) 등의 장계를 보니, 세자의 증후가 가볍지 않은 듯하여 너무도 애가 타고 답답합니다. 유후성(柳後聖)을 장계에서 말한 대로 급히 떠나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그저께 이미 유후성, 정지문(鄭之問) 등이 의약(議藥)하였는데, 증후가 이미 바뀌었으므로 지금은 괴(塊)를 다스리고 음식을 잘 먹게 하는 탕제를 써야 합니다. 이에 상당하는 약재를 먼저 파발로 내려 보내서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하여금 따로 군관을 정해 주야로 달려가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감히 아룁니다.”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P0_A16_05A_04A
5월 11일 문정전 월랑에서 사은사를 인견할 때 우의정 신경진 등이 입시하여 사행의 결과와 청나라의 실정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상세히 알지 못합니다. 관작이 있는 사람과는 절대 접촉할 수 없었고, 또 잡혀간 사람들은 사사로이 우리 처소에 들어올 수 없었으니, 저 나라의 정황을 흘려 줄까 염려해서일 것입니다. 대개 동궁이 미령(未寧)한 것을 저 사람들이 많이 의심하여 사실이 아닐 거라는 의구심을 가졌는데, 그 때문에 용골대(龍骨大) 장군이 세자를 뵙기를 청하였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세자를 본 뒤에 무슨 말이 있었는가?”하니,
신경진이 아뢰기를, “신들이 용골대 장군에게 말하기를, ‘세자가 미령하신데, 우리들이 체후가 안녕해지시는 것을 못 보고 돌아가게 되어 몹시 염려스럽다. 며칠 더 머물러 증세를 보고서 돌아가 국왕에게 보고하고자 한다.’라고 하였는데, 용 장군이 뒤이어 세자를 만나 보고는 말하기를, ‘세자의 병은 갑작스러운 산증(疝症)이 아니고, 지나치게 심려한 탓에 그런 것이다. 국왕이 전송할 때 조심하라고 당부하였건만 심려로 몸을 상하게 되어 미령한 상태에 이른 것이니, 마음을 편히 가지고 섭생에 조심하기 바란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만나 본 다음에는 과연 실제로 병이 났음을 안 것인가?”
하니, 신경진이 아뢰기를, “용 장군이 전날 세자를 본 것은 사적으로 만난 것이었습니다. 이튿날 황제의 명으로 와서 만났는데, 만난 다음에는 과연 실제로 병이 났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자가 미령한 중인데 조석으로올리는 찬물(饌物)이 너무도 보잘것없어 배종한 신하들이 매우 깊이 염려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찬물을 적당히헤아려 들여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해조로 하여금 찬값을 들여보내게 하라.”하였다
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P0_A16_05A_11A
5월 25일 세자의 신병이 예사롭지 않다고 하므로 박군 등에게 처방을 의논하게 해서 별지에 서계한다는 내의원 도제조 등의 계
허계가 내의원 관원이 전하는 도제조와 제조의 뜻으로 아뢰기를,
“삼가 들으니, 세자가 앓고 있는 설사 증세가 예사롭지 않다고 하니 신민(臣民)이 걱정하는 - 원문 빠짐 - 어찌 이루 다 비유할 수 있겠습니까. 유후성(柳後聖)은 이미 강을 건넜습니다. 박군(朴頵)의 의술도 정교하니 상의하여 처방 - 원문 빠짐 - 최득룡(崔得龍)은 설사를 잘 치료하고 정지문(鄭之問)은 약을 써서 효험을 본 일이 많으니 모두근일에 - 원문 빠짐 - 각각 논증하게 하여 별지에 서계합니다. 얼핏 들으니, 금명간에 중사(中使)가 가는 편이 있다고 하니 - 원문 빠짐 - 보내서 배종하는 재신들로 하여금 참작해서 채택하여 쓰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인조 18년(1640)
10월 16일 왕세자를 치료할 수 있도록 침의 박태원을 먼저 보낼 것을 청하는 약방 도제조 홍서봉 등의 계
약방 도제조 홍서봉(洪瑞鳳), 제조 이현영(李顯英), 부제조 신득연이 아뢰기를,
“왕세자의 미령한 증후 중에서 번열(煩熱) 증상은 상당히 나았으나 완쾌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일전에 들여보낸십미도적산(十味導赤散)과 우황고(牛黃膏) 등의 약을 바로 복용하고 나면 효과를 볼 듯하니, 그 결과를 보고서 다시 약을 의논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빈궁의 옥후(玉候)가 미령한 증상이 실로 가볍지 않아 신들이 너무도염려스럽습니다. 즉시 어의들과 적합한 약제(藥劑)를 상의하여 거기에 들어갈 약재를 급히 들여보내야겠습니다그리고 왕세자가 앓고 있는 오른쪽 어깨와 팔, 무릎과 정강이가 시큰거리는 증상에는 침구 치료가 가장 적합하다고 합니다. 여염의 사람들은 날씨가 추워도 아주 급한 병이 있으면 침구 치료하고 욱실(燠室)에서 난방하고서 효과를 보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침의 박태원(朴泰元)을 대군과 함께 가는 것으로 계하하셨으나, 급히 먼저 보내서제때 침구 치료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침구 치료는 날이 따뜻해진 다음에 해도 된다.” 하였다.
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P0_A18_10A_16A
인조 22년(1644)
3월 12일 세자의 신병에 대해 의약한 결과를 보고하고 탕약 재료를 보낼 것을 청하는 약방 제조 우참찬 이경석 등의 계약방 제조 우참찬 이경석(李景奭)과 우부승지 강대수가 아뢰기를, “삼가 배종 재신(陪從宰臣)이 올린 장계와 의관(醫官) 등이 올린 서계(書契)를 보니, 세자가 앓고 있는 감기의 증후가 가볍지 않아 놀라움과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화해제(和解劑)를 이미 썼다고 하나 앞으로 증상이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신들이 방금 여러 어의들과 약을 상의하였는데, ‘인삼강활산(人蔘羌活散) 몇 첩을 드신 후에 만약 쾌차하지 않는다면 소시호탕(小柴胡湯)에 지골피(地骨皮)·상백피(桑白皮)·황련주초(黃連酒炒)·산치인초(山梔仁炒)·지각(枳殼)·건갈(乾葛) 각 1전(錢)을 첨가해서 탕약을 조제하여 서너 첩을 계속 복용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어의 중에 나이가 젊은 사람이 한 사람 있으니, 이 탕약 재료를 싸 가지고 가도록 즉시 역마를 내주어 주야로 말을 달려 나아가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도제조 김류(金瑬)는 병으로 나오지 못하였는데, 그의 뜻도 이와 같습니다. 감히 이렇게 우러러 여쭙니다.”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이미 강을 건넜다면 다시 올라오게 하라.”하였다.
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P0_A22_03A_12A
인조 23년(1645)
1월 10일 체후의 조섭 등에 대해 문안하는 약방의 계
약방이 아뢰기를, “초봄의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는데, 삼가 현재 성상의 옥체는 어떠하십니까? 동궁(東宮)께서 미령(未寧)하다는 보고가 조섭 중이신 지금 당도하였으니, 성상의 마음에 반드시 크게 심려를 끼쳐 드렸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신들이 삼가 지극히 우려하는 마음을 견딜 길 없어 감히 와서 문안드립니다. 그리고 심양(瀋陽)에 있는 의관(醫官)이 서계에서 언급한 증상 기록을 가지고 의관들과 알맞은 약제를 의정한 다음 별도로 어의 가운데 한 사람을 선발하여 해당 약재 및 다른 약재들을 가지고 밤낮없이 달려가 증상에 맞게 투약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아울러 이렇게 우러러 여쭙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증후는 전과 다름이 없다.” 하였다.
어의 박군이 세자의 신병에 대한 약을 의정하는 일로 나갔다
어의 박군(朴頵)이 세자의 증후에 대한 약을 의정하는 일로 나갔다.
선전관 등을 보내 왕세자를 문후하고 오게 할 것을 청하는 비변사의 계
비변사가 아뢰기를, “왕세자가 꽁꽁 얼어붙은 길을 오느라 기후가 미령하니, 신민들의 근심하는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이미 내국(內局)에서 의관을 가려 정하여 약물을 가지고 내려가게 하였습니다. 강을 건너고 난 뒤의 기체(氣體)가 평안한지의 여부를 자세히 알 수 없으니, 별도로 선전관(宣傳官)과 금군(禁軍) 1인을 보내어 문후하고 오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답하기를,
“금군은 오늘 아침에 이미 보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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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9일 조섭 중인 세자의 행차는 조리하고 회복하기를 기다려 출발하도록 재신 등에게 하유할 것을 청하는 비변사의 계비변사가 아뢰기를, “‘칙사와 동행하는 것은 병을 조리하는 데 방해가 되고, 병환으로 인해 곳곳에서 멈추는 것도 온당하지 못하니, 먼저 들어오라는 뜻을 관원를 보내 알리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다. 이 뜻을 묘당에 말하라.’라고 전교하셨습니다. 신들은, 세자의 증세가 오래도록 회복되지 않고 있다고 듣고서 지극한 우려를 금치 못하여 조섭을 위해 행차를 멈출 것을 계청(啓請)하려고 하였습니다. 지금 하교를 받드니, 성상께서 우려하시는 바가 지극히 타당합니다. 적합한 관원 1인을 급히 보내어, 밤낮없이 달려가 칙사는 잘 타일러 전에 정한 날에 서울로 들어오도록 하고 세자의 행차는 모처에 머물며 조용히 조리하고 회복하기를 기다려 출발하도록 하라는 뜻으로 재신(宰臣)과 원접사(遠接使)에게 모두 하유(下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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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일한양 도착 후 의약할 수 있도록 세자 병증의 기록을 내려 줄 것을 청하는 약방 도제조 영의정 김류 등의 계
두 번째 아뢰기를, “세자의 증후가 지금까지도 그대로인 것은 필시 오랜 여정에 고생하면서 제대로 조섭하지 못해서 그러한 것입니다. 여정 중에는 의관들이 증세에 따라 약을 올렸으나, 서울로 들어오고 난 뒤의 증후는 밖에서는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병증의 기록을 내려 주신 뒤라야 약을 의논할 수 있습니다. 감히 이렇게 우러러 여쭙니다.”하니, 답하기를,
“의관으로 하여금 세자에게 물어보게 하라.” 하였다.
세자를 간병한 결과를 보고하는 약방 도제조 영의정 김류 등의 계
세 번째 아뢰기를,
“전교하셨습니다. 의관들로 하여금 세자의 증후를 알아보게 하였더니, ‘전에 앓던 여러 증세들은 거의 회복되었으나 기침이 나고 숨이 차고 침이 탁하고 번갈이 나고 음식 맛을 모르는 증세는 여전히 다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외감(外感)은 비록 풀렸으나 위(胃)의 열이 아직 남아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모영수탕(二母寧嗽湯)에 지골피(地骨皮)와 맥문동(麥門冬)을 각 1돈씩 가미하여 5첩을 연달아 복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대로 지어 올리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 《약방일기》에 의거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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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4일 세자를 간병한 결과를 보고하는 도제조 김류 등의 계
도제조 김류와 부제조 행 도승지 윤순지가 두 번째 아뢰기를,
“신들이 최득룡(崔得龍), 유후성(柳後聖), 박군(朴頵) 등으로 하여금 나아가 세자의 증후를 살펴보게 하였더니, 기침이 나고 숨이 차며 어지러운 증세 등은 더해지기만 하고, 목이 말라 물을 켜고, 입이 쓰고 맛을 모르는 증상은 전과 같으며, 땀나는 증상은 다소 그쳤고, 잠은 제법 편안한 듯하며, 음식량도 조금 늘었으나, 메스껍고 신물이 올라오는 증상이 때때로 있다고 합니다. 세 의관과 상의하였더니, 모두가 ‘피로하여 생긴 증상은 아직 다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여러 증상은 모두 담화(痰火)와 울열(鬱熱)로 인하여 생긴 것이니, 전날 지어 올렸던 이모영수탕(二母寧嗽湯)에 원래 넣었던 치자(梔子)와 황금(黃芩)을 2푼을 덜어 내어 1돈으로 한 뒤 함께 볶아서 넣고 이전대로 5첩을 추가하여 올리고서 천천히 증세의 가감을 보며 다시 다른 약을 의논해 보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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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6일 동궁을 간병한 결과를 보고하는 약방의 계
약방이 두 번째 아뢰기를, “방금 최득룡(崔得龍), 유후성(柳後聖), 이형익(李馨益), 박군(朴頵)이 동궁의 증후를 진찰하고는, ‘근래 다시 감기에 걸려 더쳤으므로 열의 기세가 가볍지 않습니다. 다른 나머지 여러 증세도 모두 열에 속하니, 의당 열을 내리고 풀어 주는 약제를 써서 서서히 그 효험을 관찰하고 다시 다른 약을 상의해야 합니다. 지난번의 소시호탕(小柴胡湯)에 생강즙에 축여 볶은 황련(黃連), 볶은 치자(梔子) 각 7푼과 지모(知母)·지골피(地骨皮)·건갈(乾葛) 각 1돈을 더하여 연달아 3첩을 올리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대로 지어 들이겠습니다. 감히 여쭙니다.”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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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9일 세자에게 입진한 결과를 보고하고 소시호탕을 더 지어 들이겠다는 약방의 계
약방이 두 번째 아뢰기를, “방금 최득룡(崔得龍), 이형익(李馨益), 박군(朴頵) 등이 세자의 증후를 입진하고는 모두, ‘전에 시호탕(柴胡湯) 3첩을 쓴 뒤 열은 태반이 줄어들었으나, 감기의 증상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담화(痰火)가 위로 올라가 기침, 오심(惡心), 탄산(呑酸)의 여러 증세가 지금까지도 없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소시호탕(小柴胡湯)에 행인(杏仁)·지모(知母)·지골피(地骨皮)·지각(枳殼) 각 1돈과 생강즙에 축여 볶은 황련(黃連)·볶은 치자인(梔子仁) 각 7푼을 추가하여 다시 2첩을 올린 다음에 증세가 더해지는지 줄어드는지를 보아 다시 다른 약을 상의하고, 죽력(竹瀝)을 생강즙에 타서 연달아 복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습니다. 죽력은 날마다 올리고 위의 약 2첩은 더 지어 들이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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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세자를 간병한 결과를 보고하는 부제조 윤순지의 계
부제조 윤순지가 두 번째 아뢰기를, “방금 의관 최득룡(崔得龍) 등이 세자에게 나아가 문안하니, 하령(下令) 내에 ‘전에 들인 소시호탕(小柴胡湯)이 제법 효과가 있는 듯하고 남은 감기 증세도 아직 다 풀리지 않았으니 이 약을 더 복용하도록 하겠다.’ 하였습니다. 의관들도, ‘전처럼 가미하여 연달아 세 첩을 복용한 뒤에 다시 다른 약을 의논해 보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대로 지어 올리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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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4일 모화관에서 세자가 전별연을 설행한 결과를 보고하는 도감의 계
도감이 아뢰기를, “칙사가 출발하여 모화관(慕華館)에 도착하였습니다. 세자가 전별연(餞別宴)을 베푸니, 칙사가 ‘세자의 기체가 현재 아직 회복되지 않았으니 수고롭게 거둥하여 몸을 더 상하게 할까 걱정됩니다.’라고 하면서 자리에서 술을 돌릴 것을 청하였습니다. 재추(宰樞)도 전날 남별궁(南別宮)에서 접대하여 연회를 베풀 때의 규례대로 한 사람만 술을 돌렸습니다. 여섯 잔에서 그치고는 바로 떠났습니다. 도감 당상 이하는 규례대로 사현(沙峴) 아래에서 지송(祗送)하였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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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5일 동궁에게 입진하여 의약할 것을 청하는 약방 도제조 영의정 김류 등의 계
“동궁의 증후가 아직 낫지 않았는데 교외에서 수고로이 거둥하였으니, 혹 몸을 더 상하였을까 염려됩니다. 즉각 의관으로 하여금 입진(入診)한 뒤 알맞은 약을 의논하여 정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감히 아룁니다.”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동궁에게 입진한 결과를 보고하는 약방 도제조 영의정 김류 등의 계
“신들이 방금 최득룡(崔得龍), 이형익(李馨益), 박군(朴頵) 등으로 하여금 동궁의 증후를 입진하게 하니, 동궁이 박태원(朴泰元)을 아울러 불러들여 동참하게 하였습니다. 이 네 사람이 신들에게 말하기를, ‘전부터 편치 않았던 여러 증후는 모두 삼분의 이가 줄었고 안색도 화평하나 입맛이 쓴 것이 평소와 같지 않으니, 이는 간화(肝火)가 아직 남아 있어 그러한 것입니다. 시호연교탕(柴胡連翹湯)에 석고단(石膏煅) 1돈, 죽여(竹茹) 5푼, 지골피(地骨皮)·지모(知母) 각 8푼을 추가해 5첩을 연이어 복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고, 또 ‘간화의 상승이 지금의 주된 증상이니, 반드시 침과 약을 병행하여 안과 밖에서 함께 다스린 후에야 빠른 효험을 볼 수 있습니다. 간담경(肝膽經)과 심경(心經)의 여러 혈에 두세 번 침을 놓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위의 약 5첩을 우선 지어 들이고, 침 맞는 것은 날을 택하여 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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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6일 세자에게 침을 놓겠다는 약방의 계
“세자가 침을 맞는 일은 택일하여 하겠다고 어제 이미 계품(啓稟)하였습니다. 여러 의원이 오늘이 침 맞기에 좋은 날이라고 하니, 성상부터 뜸을 뜬 뒤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 《약방일기(藥房日記)》에 의거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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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0일 세자에게 입진한 결과를 보고하는 세 제조의 계
“왕세자가 침을 맞을 때 의관 최득룡(崔得龍)·이형익(李馨益)·박태원(朴泰元)·박군(朴頵)으로 하여금 증상을 입진하게 하니, 모두 ‘전날 앓던 어지럽고 숨이 차고 구역질이 나고 신물이 올라오는 증상 등은 이미 다 나았으나 기침은 아직까지도 가시지 않았습니다. 또 얼마 전부터 몸이 나른하고 늘 잠이 오는데, 이는 외열(外熱)은 가셨으나 담화(痰火)가 아직 있고 위기(胃氣)가 허약하기 때문이니 마땅히 화를 없애고 담을 다스리는 약재를 쓴 다음에야 효과를 볼 수 있을 듯합니다. 화담청화탕(化痰淸火湯)에 적복령(赤茯苓)·맥문동(麥門冬) 각 7푼과 지각(枳殼) 5푼을 추가해 5첩을 연이어 복용하고, 천천히 증세를 살피고 나서 다른 약을 논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습니다. 이대로 조제하여 들이겠습니다. 또 당초 침은 3번 맞는 것으로 계품하여 정했는데 침의들이 ‘이번에 3번 맞아 약간의 효험이 있었으니 2번을 더 맞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감히 이렇게 우러러 여쭙니다.”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왕세자가 침을 맞은 뒤 세 제조가 문안하였다
왕세자가 침을 맞을 때 세 제조가 숭화문(崇化門) 안에 이르러 입시하겠다는 뜻을 품달(稟達)하니, 입시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침을 맞은 뒤 세 제조가 문안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 《약방일기》에 의거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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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4일 세자가 침을 맞은 결과를 보고하는 약방 도제조 영의정 김류 등의 계
약방 도제조 영의정 김류(金瑬), 제조 예조 판서 남이웅(南以雄), 부제조 행 도승지 윤순지가 아뢰기를, “오늘 세자가 다섯 번째 침을 맞을 때 입시했던 의관 최득룡(崔得龍)·이형익(李馨益)·박태원(朴泰元)·박군(朴頵) 등이 나와서 신들에게 말하기를, ‘증세를 진찰해 보니 거의 회복되었습니다. 비록 열이 다 사라지지는 않았으나 이것 때문에 입에 쓴 약을 연달아 쓸 수 없으니, 우선 열흘 간 정양하고 서서히 증세를 살펴 가면서 다시금 적당한 약을 의논하여 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부터 침과 약을 모두 정지하도록 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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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8일 왕세자를 간병한 결과를 보고하는 약방 도제조 영의정 김류 등의 계
약방 도제조 영의정 김류(金瑬)와 제조 예조 판서 남이웅(南以雄)이 아뢰기를,
“왕세자의 증후에 관하여, 전에 의관의 말로 인하여 열흘간 정섭하면서 서서히 증세를 살펴 다시 적당한 약제를 의논하겠다고 입계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방금 최득룡(崔得龍), 유후성(柳後聖), 박군(朴頵) 등이 밖에서 미품(微稟)하기를, ‘천식(喘息), 가슴이 답답함, 정신이 흐릿함 등의 증세가 며칠 전부터 심해졌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최득룡 등 세 사람과 상의해 보니, 모두 ‘이들 증후는 모두 폐화(肺火)에 속하니, 화를 맑게 하고 하기(下氣)시키는 약제를 사용하여 폐의 열을 내리면 여러 증세들도 자연히 물러날 것입니다. 청폐탕(淸肺湯)에 지모(知母) 8푼을 넣어 10첩을 연이어 복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대로 지어서 들이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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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4일 세자를 입진한 결과를 보고하는 도제조의 계
“의관 최득룡(崔得龍)·이형익(李馨益)·박군(朴頵) 등이 세자의 증세를 입진하고는, ‘이전 증세 외에 현재 추가된 것은 없습니다. 다만 흉격(胸膈)이 갑갑한 것이 정충(怔忡)의 조짐이 있는 듯하니, 전에 올렸던 청폐탕(淸肺湯)에 지모와 시호(柴胡) 각 1돈, 생강즙에 축여 볶은 황련과 죽여(竹茹) 각 5푼을 가미하여 5첩을 연달아 복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대로 지어 들이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 《약방일기》에 의거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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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동궁을 간병한 결과를 보고하는 약방의 계
“상께서 침을 맞으신 후에 최득룡(崔得龍), 박태원(朴泰元), 박군(朴頵) 등으로 하여금 동궁(東宮)에 나아가서 안부를 묻도록 하였더니 모두들 ‘맥도는 화평하여 모두 이미 회복되었으나 심한 천식과 해수(咳嗽) 증상이 아직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으며 또 오른쪽 다리 아래에 두드러기 같은 것이 나서 계속 긁고 있으니, 앞서 올렸던 청폐탕(淸肺湯)에 지모·시호·지골피(地骨皮)·연교(連翹) 각 1돈과 술에 축여 볶은 황련 7푼을 더 넣어 10첩을 연이어 드시는 것이 합당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대로 지어서 들이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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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1일 왕세자를 간병한 결과를 보고하는 약방의 계
“조섭 중인 왕세자의 기후는 근일에 청폐탕(淸肺湯) 20첩을 연이어 복용하고 앓던 증후가 거의 회복되었습니다. 다만 해수(咳嗽)와 식후의 혼곤증(昏困症) 등이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았으나 탕약을 연이어 쓸 수는 없습니다. 화(火)를 맑게 하고 담(痰)을 삭이며 위기(胃氣)를 고르게 하는 약을 써야 하므로, 죽력지출환(竹瀝枳朮丸)에 생강즙에 축여 볶은 산치인(山梔仁) 5푼과 연교(連翹) 1냥을 더 넣고 연이어 복용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합니다. 이대로 지어서 들이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지어서 들이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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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5일 세자궁에 타락죽을 하루 걸러 쑤어 들이라는 전교
전교하기를, “세자궁에 타락죽(駝酪粥)을 하루 걸러 쑤어서 들이라.”
하였다. - 내하 일기초에 의거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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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6일 세자를 간병한 결과를 보고하는 약방의 계
“어제 왕세자가 박군(朴頵)을 불러 하문하기를, 근래 전에 앓던 병은 거의 회복되었으나 다만 두통으로 이따금 어지러우며 식후에는 혼곤하고 배 속이 편치 않으며 양 옆구리가 땅기고 온몸이 무겁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박군, 유후성(柳後聖) 등과 상의하였더니, 이는 비위가 허약하여 담화(痰火)가 기승을 부리는 탓이므로 자음건비탕(滋陰健脾湯)에 황련(黃連)과 치자인(梔子仁)을 둘 다 생강즙에 축여 볶아 각 5푼을 더 넣고 연이어 10첩을 드시는 것이 합당하다고 합니다. 이대로 지어 들이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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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3일 세자에게 입진한 결과를 보고하는 좌부승지 이행우의 계
“오늘 오시(午時) 무렵 세자에게 오한으로 떠는 증후가 다시 나타나서 박군(朴頵), 이형익(李馨益) 등으로 하여금 입진하게 하였더니 ‘지난 22일 밤에 갑자기 오한으로 떨었으며 오늘도 다시 이러하니, 이는 틀림없이 학질 증세입니다. 우선 내일 아침에 침을 놓아 학열(瘧熱)을 내리고 다시 증후를 살펴서 약을 의논하는 것이 합당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이형익이 때맞추어 들어가서 침을 놓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 《약방일기》에 의거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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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4일 왕세자를 간병한 결과를 보고하는 약방의 계
“왕세자가 지난 21일 밤에 갑자기 오한으로 떨다가 한참 만에 그쳤습니다. 22일에는 기후가 평소와 같았고, 23일 사말(巳末)에 다시 오한으로 떨었는데 갖옷을 여러 겹 입었어도 추워서 위축되는 증세를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녁이 되자 한기는 비로소 풀렸으나 이어서 번열(煩熱)이 생겨 정신이 혼미해졌으며 청심원(淸心元)을 드시고 조금 진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열이 내리지 않아 밤새도록 번뇌하며 잠자리에 들지 못하였고, 갈증도 심하여 정화수(井華水)를 드셨으나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으며, 숨이 거칠어 편안히 눕지 못하였습니다. 유후성(柳後聖)과 박군(朴頵) 등 여러 어의(御醫)에게 이런 증세에 대해 물었더니, 우선 시호지모탕(柴胡知母湯)에 껍질째 볶은 치자(梔子)와 생강즙에 축여 볶은 황련(黃連) 각 1돈, 소금물에 축여 볶은 황백(黃柏) 5푼을 더 넣어 3첩을 복용하게 한 뒤에 우선 증후가 어떠한가를 살펴 다시 의논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대로 지어서 들이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 《약방일기》에 의거함 -
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grpId=&itemId=ST&gubun=book&depth=4&cate1=&cate2=&dataGubun=%EC%9D%BC&dataId=ITKC_ST_P0_A23_04A_24A
4월 25일 최득룡을 오게 하여 왕세자의 상한증에 대해 의약하게 할 것을 청하는 세 제조의 초기
세 제조가 초기로써 아뢰기를 “방금 왕세자의 상한증(傷寒症)이 오래도록 풀리지 않아서 박군(朴頵)으로 하여금 입진하여 약을 의논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들은 일찍이 최득룡(崔得龍)이 상한증을 가장 잘 치료한다고 들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박군 혼자 막중한 일을 전담하게 할 수는 없으니 최득룡을 오게 하여 약을 의논하는 반열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 《약방일기》에 의거함 -
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grpId=&itemId=ST&gubun=book&depth=4&cate1=&cate2=&dataGubun=%EC%9D%BC&dataId=ITKC_ST_P0_A23_04A_25A
4월 26일 왕세자를 간병한 결과를 보고하는 세 제조의 계
세 제조가 두 번째 아뢰기를, “방금 왕세자의 증후에 대해 최득룡(崔得龍)에게 물었더니, 상한증(傷寒症)이 풀리지 않은 지 오늘로 엿새가 되었으므로 소시호탕(小柴胡湯)에 건갈(乾葛)·지모(知母)·술에 씻은 생지황(生地黃)·지골피(地骨皮) 각 1돈과 볶은 황백(黃柏)·볶은 치자(梔子) 각 7푼 및 소금을 넣은 술에 축여 볶은 황백(黃柏) 5푼을 더 넣고 연이어 3첩을 복용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대로 지어서 들이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세자의 병세가 위중하므로 침을 맞는 것을 물려 행할 것을 청하는 세 제조의 계
세 제조가 아뢰기를, “세자의 증후가 위중하여 신들이 세자궁에 나아와 대령하고 있으므로 침을 맞으시는 것을 조금 물려서 행하소서. 감히 여쭙니다.”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이어 전교하기를, “침을 맞을 때 침의(鍼醫) 2인만 입시하고 여러 어의는 모두 세자궁에 나아가 대령하라.”하였다.
왕세자의 병세가 위중하므로 어의 최득룡 등을 궐내에 입직하게 할 것을 청하는 세 제조의 계
“왕세자의 증후가 가볍지 않습니다. 담화(痰火)가 뜻하지 않게 위로 올라갈 때가 있으니 응급조치를 미리 생각해 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늘부터 어의 최득룡·유후성(柳後聖)·이형익(李馨益)·박태윤(朴泰允) 등을 병이 조금 나을 때까지 궐내에서 입직하게 하고, 제조 1원도 번갈아 직숙하도록 하소서. 감히 아룁니다.”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왕세자가 훙서하였다
오시(午時)쯤에 왕세자가 훙서(薨逝)하였다.
약방의 문안에 대해, 망극한 참변을 당하였다는 비답
약방이 문안하니, 답하기를, “뜻밖에 이런 망극한 참변을 당하였다.” 하였다.
- 《약방일기》에 의거함 -
예조의 초기에 대해, 4일째 되는 날에 성복하라는 비답
예조의 초기에 답하기를, “찬궁(欑宮)을 설치하지 말고, 4일째 되는 날에 성복(成服)하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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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7일 왕세자의 신병을 제대로 살피지 못해 슬픔을 초래하였으므로 대죄한다는 세 제조의 계
세 제조가 아뢰기를, “신들은 모두 형편없는 자질로 외람되이 내국의 직임을 맡고 있으나 약을 사용하는 방법은 전혀 알지 못하고 의관들의 말만 따를 뿐입니다. 지금 왕세자의 병환이 5, 6일이나 되었으나 정확한 병명도 알아내지 못하였고 사용한 약도 모두 증세에 적합한 약이 아니었습니다. 신들은 자리만 차지한 채 제대로 살피지 못하여 한없는 슬픔을 초래하였으니 신들의 죄를 이루 다 벌할 수 있겠습니까. 지극히 두려운 마음을 금할 수 없어 땅에 엎드려 대죄(待罪)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대죄하지 말라.”하였다. - 《약방일기》에 의거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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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2일 옥당의 차자에 대해, 이형익의 침술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는 비답
옥당이 차자를 올렸는데, 입계하니, 답하기를,
“이형익(李馨益)의 침술은 꽤 신묘하다. 그래서 전부터 맞아 왔으니 의심할 것 없다. 경들은 지나치게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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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15년(1637)
2월 8일이별 구왕이 청나라로 돌아갔다
세자가 밝을 녘에 망원정을 떠나 창릉에 도착하였다.
임금이 서울에서부터 행행하여 구왕을 만난 뒤 세자와 이별하였다.
3월 6일 중화현감 김술과 강서현령 이대순이 돌아갔다.
세자의 기후가 편치 않으므로 화개산 1부를 올렸다.
3월 7일 호행하는 청인 판부가 서부에는 인가가 적어 주둔하기가 곤란하니 진을 옮기자고 하였다.
세자의 환후가 오래도록 낫지 않으므로 의관 정남수가 입시하여 진맥하고 또 화개산에 다른 약재를 조금 가미하여 1부를 올렸다.
3월 9일 세자가 덕연에 머물렀다.
세자의 환후가 회복되었다.
(3/9 덕연 도착 −3/20 덕연 출발 – 이후 4/11 심양 도착)
윤4월 10일심양 도착 후 세자가 심양 관소에 머물렀다.
필요가 없다”라고 답하였다.세자의 기후가 편치 못하여 재신과 시강원이 문안하고 약을 의논하기를 청하자 “이미 땀을 흘렸으니 약을 의논할
5월 15일 세자가 곽란을 앓아 평위산 1부를 올렸다.
재신과 시강원이 문안하니 “토사한 후 차도가 있는 듯하다”라고 답하였다.
5월 21일 - 세자가 안질로 침을 맞았다.
9월 13일 의관 유달이 입시하여 침을 놓았다.
인조 16년(1638)
2월 22일 세자가 눈병이 나서 의관 박군과 유달을 불러들여 진찰을 받았다.
2월 26일 눈병으로 침을 맞았다. 유달이 침을 놓고, 필선 민응협과 사서 김종일이 입시하였다.
2월 27일 두 번째로 침을 맞았다.
2월 29일 세 번째로 침을 맞았다.
3월 3일 네 번째로 침을 맞았다.
3월 5일 다섯 번째로 침을 맞았다.
3월 7일 여섯 번째로 침을 맞았다.
3월 9일 일곱 번째로 침을 맞았다.
3월 19일 비로소 세자에게 감기 기운이 있는 것을 알았다.
3월 20일 구미강활탕을 지어 바쳤다.
4월 16일 세자가 곽란 증세를 보여 문안하였다.
4월 18일 세자가 산증으로 태충혈에 침을 1대 맞고 대돈혈에 뜸을 5장씩 떴다.
4월 19일 대돈혈에 뜸을 7장씩 떴다.
(*주석: 일반적으로 대돈혈에는 뜸을 3장씩 뜨는데, 여기서 7장씩 뜬 것은 산증이 더 심해져 통증이 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초조녁에 산증 증세가 치고 올라오므로 좌측 독음혈에 뜸을 15장 떴다.
4월 22일 의관을 불러들여 진찰을 받았다.
4월 23일 의관을 불러들여 진찰을 받고 좌우측 기죽마혈에 뜸을 5장씩 떴다.
4월 24일 의관을 불러들여 진찰을 받고 뜸을 기해혈에 7장, 우측 천추혈에 5장 뜨고, 좌측 삼음교혈에 침을 맞았다.
예부의 의관 뇌명덕을 청하여 진찰을 받았다.
4월 25일 의관을 불러들여 진찰을 받고 우측 대맥혈에 7장, 우측 천추혈에 5장, 기해혈에 3장 뜸을 뜨고, 우측 장문혈에 침을 맞았다.
4월 26일 의관을 불러들여 진찰을 받고 우측 대맥혈에 5장, 우측 천추혈에 5장, 기해혈에 3장 뜸을 뜨고, 중완혈과 좌측 중봉혈에 침을 맞았다.
(*이쯤 유후성을 보내달라고 장계를 보낸 것으로 추정/심양장계 인조16 4/26)
4월 27일 의관을 불러들여 진찰을 받았다.
4월 28일 의관을 불러들여 진찰을 받았다.
4월 29일 의관을 불러들여 진찰을 받고 좌우측 기충혈에 5장씩, 기해혈과 우측 천추혈, 우측 대맥혈에 각각 3장씩 뜸을 떴다.
5월 1일 의관을 불러들여 진찰을 받았다.
5월 2일 의관을 불러들여 진찰을 받고 기해혈에 3장, 우측 천추혈에 3장, 우측 기충혈에 5장 뜸을 뜨고, 우측 갈비뼈 아래 아시혈과 좌우측 족삼리혈에 침을 맞았다.
5월 3일 의관을 불러들여 진찰을 받고 좌측 태충혈과 좌측 내정혈, 좌우측 내관혈, 아랫배 우측 아시혈에 침을 맞았다.
5월 4일 의관을 불러들여 진찰을 받고 기해혈에 7장, 좌우측 기충혈에 3장씩 뜸을 뜨고, 좌우측 신문혈과 좌측 족삼리혈에 침을 맞았다.
5월 5일 의관을 불러들여 진찰을 받고 기해혈에 7장, 좌우측 기충혈에 3장씩 뜸을 뜨고, 중완혈에 침을 맞았다.
5월 6일 의관을 불러들여 진찰을 받고 기해혈에 7장, 기충혈에 5장씩 뜸을 떴다.
세자가 낮에 재신과 연관을 접견하다 책상에 기대어 한숨을 쉬고 눈물을 흘리니 신하들이 차마 우러러 볼 수 없었다.
5월 7일 의관을 불러들여 진찰을 받으니 이질 증세가 있었다.
5월 8일 의관을 불러들여 진찰을 받았다.
오후에 세자가 기의 흐름이 막혀 딸꾹질을 하였다. 신하들이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의관을 불러들여 진찰을 받고 좌우측 열결혈에 침을 맞으니 기의 흐림이 원만해졌다.
5월 9일 이질 증세가 조금씩 나을 기미를 보여 의관을 불러들여 진찰을 받았다.
5월 10일 의관을 불러들여 진찰을 받았다.
내관 김희안이 장계를 가지고 나갔다. (*이 장계는 세자의 산증이 한 달이나 이어지고 있는 것을 걱정하는 내용 심양장계 인조16 5/10))
5월 11일 의관을 불러들여 진찰을 받았다.
5월 12일 의관을 불러들여 진찰을 받았다.
저녁에 청주가 용골대와 가린 및 의관을 보내 세자의 병을 살피게 하였다. (*주석: 용골대가 한인 의관을 데리고 관소에 와서 진찰하고 간 것은 세자가 정말로 병이 난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5월 13일 의관을 불러들여 진찰을 받았다.
5월 14일 의관을 불러들여 진찰을 받았다.
저녁에 뱃속이 불편한 증세가 있어서 의관을 다시 불러들여 진찰을 받았다.
5월 15일 의관을 불러들여 진찰을 받았다.
5월 16일 의관을 불러들여 진찰을 받았다.
5월 17일 의관을 불러들여 진찰을 받았다.
재신 이하가 오늘부터 비로소 저녁 문안을 중단하였다.
5월 18일 문안선전관 이경빈이 돌아갔다. 그 편에 병이 회복되었다는 장계를 보냈다. 백광조도 돌아갔다.
6월 1일 첨지 유후성이 들어왔으나 곧장 관소로 오지 못하고 서관에 억류되었다. (*조정에서 보낸 어의, 5/4 출발한 것으로 추정(승정원일기5/4))
6월 6일 선전관 박형이 문안하러 들어왔으나, 곧바로 관소로 오지 못하고 서관에 억류되었다. (*조선 조정에서 세자의 병문안을 하기 위해 선전관 박형을 심양으로 보냈다.)
6월 11일 유후성을 불러들여 좌우측 장문혈, 태충혈, 족임읍혈, 내정혈, 삼음교혈에 침을 맞았다.
6월 17일 유후성 등을 불러들여 진찰을 받았다.
6월 21일 유후성이 떠났다. 그 편에 장계를 보냈다. (*세자의 병이 차도가 있어 유후성을 귀국시킨다는 내용)
6월 29일 세자의 오른쪽 다리에 습종이 생경 유달을 불러들여 침을 맞았다.
8월 4일 청나라 황제가 서행하는데 세자도 동행하기를 바라지만, 세자가 답하기를 “감히 명령을 좇지 않을수 없으나 다만 몸에 병이 많아 그것이 걱정일 따름입니다.”라고 하였다.
11월 7일 세자가 불안한 증세를 보여 탄일망궐례를 쉬었다.
인조 17년(1639)
1월 30일 용골대 정명수가 시켜 말을 전하기를 “다음달 9일 황제께서 서행하시니 세자께서도 수행하셔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재신들이 내일 아문으로 나아가 어려움을 호소하겠다는 뜻을 먼저 정명수에게 이른 뒤에 보냈다. 저물녘에정명수가 와서 말하였다. “세자께서 말을 타는 데 익숙하지 않으시고 또 평소 산증을 앓고 계심은 황제께서 아시는 바이고 용골대 장군 또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리는데, 대군께서 만약 또 가기를 청한다면 세자께서필시 아니 가셔도 될 것이라고 합니다.
2월 1일 재신들을 인견하고 하교하였다. “내 비록 병이 있으나 봄날이 화창하여 차도를 보이고 있으니 오히려 갈만 하다.대군이 두 번째로 가는 것 또한 가엾게 여겨지는 바이다. 이뿐만이 아니고 황제가 이미 명을 내렸는데 대신 가도록 하는 일을 두 번씩이나 한다면 또한 꺼리어 피한다는 혐의가 있어 마음에 편치 않은 바가 있으니 가기를 청하고자 한다.
3월 16일 작년 여름내 앓던 산증과 갈비뼈 아래 냉괴의 뿌리가 없어지지 않아 올 봄에 다시 뜸을 뜨라는 명령이 있었으므로의관들이 일찍이 상의하여 혈에 점찍을 날을 택하여 단자를 올리니 “그대로 하라”라고 하령하였다.
3월 17일 오늘부터 뜸을 뜨기 시작하였다.
뜸뜰 시각이 임박하여 빈객과 시강원 관원들은 모두 물러나 나가 있도록 하여 서연청에는 내관 2명, 의관 유달과박군 등만 입시하였다. 기해혈에만 뜸을 21장 떴다.
재신, 강원, 약방이 문안하니 “평안하다”라고 답하였다.
3월 18일 재신, 강원, 약방이 문안하니 “평안하다”라고 답하였다.
재신이 이어 아뢰기를 “어제 뜸을 뜨고 거동이 편치 않으신데 오늘 계속 뜸 뜨는 일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니 “내일 하겠다”라고 답하였다.
3월 20일 - 재신 이하가 문안하니 “평안하다”라고 답하였다.
사시에 의관 유달이 들어와 좌우측 장문혈에 각각 뜸을 25장씩 떴다. 뜸을 뜬 후 문안하니 “평안하다”라고 답하였다.
3월 21일 재신 이하가 문안하니 평안하다고 답하였다.
사시에 의관 유달을 불러들여 좌우측 장문혈에 각각 6장, 중완혈에 21장씩 뜸을 뜨게 하였다. 뜸을 뜬 후 문안하니평안하다고 답하였다.
3월 24일 사시에 의관 유달을 불러들여 중완혈에 30장씩 뜸을 떴다.
3월 26일 사시에 의관 유달을 불러들여 좌우측 족삼리혈에 7장, 좌우측 절골혈에 5장씩 뜸을 떴다.
5월 7일 종신이 세자에게 산증이 있어서 찬 데서 자서는 안 된다는 뜻을 해당 관원에게 호소하였지만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6월 13일 본원이 서연에 대하여 여쭈니 “요즘 몸이 편치 않아 잠시 쉬겠다”라고 답하였다. 이어 의관에게 하령하기를 “요사이 더위 먹은 증세가 대단한 정도는 아니지만 음식 맛을 잃은 지 오래되었다. 의관들과 상의하여 약을 들이라”라고 하였다. 재신 이하가 문안하니 “문안하지 말라”라고 답하였다.
의관이 볶은 백작약 1돈, 진피, 볶은 신국 7푼을 가미한 유령탕 2첩을 지어 올렸다
6월 14일 재신 이하가 문안드리니 “어제 들인 약 1첩 복용하고 이미 차도가 있는 것 같으니 문안하지 말라”라고 답하였다.
9월 4일 재신 이하가 “엎드려 듣건대 이질이 있다 하시는데, 밖에서는 전혀 알지 못하여 이제야 문안드립니다”라고 아뢰니 “이미 차도가 있다”라고 답하였다.
9월 22일 재신과 강관이 아뢰었다. “용안에 화색이 없으시니 신들은 걱정스럽습니다. 편찮은 증세가 있으시면 그 증세를 적어주시어 처방하고 조제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구구한 아랫사람의 마음에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자가 “아침에 좀 추워 움츠러든 증세가 있었는데, 해질 무렵 뒤로는 덜한 것 같다”라고 답하였다.
9월 29일 강원이 아뢰었다. “삼가 편찮으신 기운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내일이 망배례인데 새벽을 무릅쓰고 예를 행하시면혹 더치시게 될까 걱정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세자가 “쉬겠다”라고 답하였다.
인조 18년(1640)
1월 22일 저녁에 승언색이 전하기를 “세자 저하께서 붉고 딱딱한 돌기가 하부 근처에 작게 나타나므로 경락으로 예방하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침의 정훤이 좌우측의 삼음교혈과 태충혈에 각각 침을 놓아다.
1월 23일 재신 강원 약방이 문안하니 “병이 이미 조금 나았으니 문안하지 말라”라고 답하였다.
2월 26일 세자의 목에 약간의 통증이 생겼다. 재신 강원 약방이 문안하니 알았다라고 답하였다.
2월 29일 재신, 강원, 약방이 문안하니 “목의 통증이 이미 사라져 나았다”라고 답하였다.
4월 16일 - 세자의 기후가 미령하여 그대로 정주에 머물렀다.
4월 18일 세자의 기후가 미령하여 그대로 머물고자 하였으나 청나라 장수가 허락하지 않았다. 묘시에 출발하여 차련에서점심을 먹고 양책에서 묵었다.
4월 29일 재신 강원 약방이 세자의 기후가 미령하여 문안하니 “땀을 낸 뒤로는 기후가 평안하다”라고 답하였다.
7월18일 세자가 귀가 아픈 증세가 약간 있어서 재신과 강관이 문안하니 “그리 대단하지는 않다”라고 답하였다.
7월 19일 재신과 강관이 문안하니 “이미 나았으니 문안하지 말라”라고 답하였다.
9월 12일 세자가 목이 타고 마르는 증세가 있고, 오른쪽에 마비 증상이 있었다. 재신과 강원이 문안하고 이어서 의관을 불러들여 진찰을 받기를 청하였다. 의관 박군이 들어와 진찰한 뒤 약을 상의하여 퇴열탕을 조제하여 들였다.
9월 13일 재신과 강원이 문안하니 “대단하지 않으니 문안하지 말라”라고 답하였다.
9월 15일 세자의 옥후가 미령하여 망전례를 쉬었다.
9월 19일 가입퇴열탕 5첩을 또 조제하여 들였다.
9월 24일 세자의 옥후가 편치 않아 다시 약을 의논한 뒤 가입사물탕 3첩을 조제하여 들었다.
9월 26일 가입사물탕 7첩을 또 조제하여 들였다.
10월 1일 병환을 조섭하는 중이라 망전례를 쉬었다
10월 19일 세자에게 감기 기운이 조금 있어서 가감충화탕 3첩을 조제하여 들였다.
인조 19년(1641)
1월24일 세자에게 진작부터 마비증세가 있었으나 이제야 침을 맞고자 하므로 재신과 강원이 의관과 함께 혈을 의논하여진언하였다. 손의 좌우측 외관혈, 후계혈 내관혈, 열결혈과 발의 좌우측 임읍혈, 내정혈, 양교혈, 공손혈, 배의 중완혈에 오시에 침을 맞았다. 침을 맞은 후 재신, 강원, 의관이 문안하니 “알았다”라고 답하였다.
1월 27일 오시에 침을 맞았다. 음교혈을 추가하고 중완혈은 빼고 나머지 혈은 전과 같이 하였다. 입시한 사람과 침을 놓은사람은 전과 같았다. 마친 후 재신, 강원, 의관이 문안하니 “알았다”라고 하였다.
2월 3일 오시에 손의 좌우측 외관혈, 후계혈, 내관혈, 발의 좌우측 내정혈, 임읍혈, 공손혈, 배의 중완혈에 침을 맞았다.
2월 6일 오시에 손의 좌우측 외관혈, 내관혈, 열결혈, 발의 좌우측 임읍혈, 태충혈, 음교혈, 삼리혈에 침을 맞았다. 잠시 설사를 하고 속이 불편한 징후가 있어서 평위산에 백작약, 적복령 각 1돈, 청피, 지각, 볶은 신국 각 7푼을 더하여 2첩을 조제해 올렸다.
2월 9일 설사 증세가 오래도록 낫지 않고 뱃속이 더욱 불편하여 수라 들기를 싫어하므로 다시 약을 의논하여 사령산에 갈아 볶은 차전자 2돈, 볶은 신국과 연육을 각 1돈씩 더 넣어 3첩을 조제하여 올렸다. [산증을 아울러 치료하였다.]
2월 11일 재신, 강원, 의관이 문안하니 “병이 대단치 않으니 문안하지 말라”라고 답하였다.
2월 17일 아침에 의관하게 하령하기를 “어제 밤부터 감기가 들어 머리가 아프고 추웠다 더웠다 하며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고 기침과 천식이 있다”라고 하였다.
재신, 강원, 의관이 문안하니 “알았다. 약을 의논하도록 하라”라고 답하였다. 인삼패독산에 상백피와 행인 각 1돈볶은 편금 5푼을 더 넣어 3첩을 조제하여 올렸다.
2월 18일 재신, 강원, 의관이 무안하니 “조제하여 들인 약을 어제 낮에 한번 복용하고 또 밤에 2경에 다시 복용했더니 자못효혐을 보아 몸이 편안해졌다. 이제 또 달여 복용하겠다”라고 세자가 답하였다.
오후에 의관이 문안하여 “여러 증세가 차도가 있으나 다만 기침이 나고 숨이 찰 때에는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불안하며 또 오한과 오심, 그리고 갑자기 음식이 싫어지는 증세가 있다.”라고 답하였다. 재신과 강원이 의관과 함께약을 의논하여 소시호탕에 황련과 치자, 그리고 생강즙에 담갔다가 볶은 지각 각 1돈을 더 넣어 3첩을 조제하여올렸다.
2월 19일 재신 이하가 문안하니 “알았다. 조금씩 회복되어 간다. 약은 계속해서 올리라”라고 답하였다.
2월 20일 재신 이하가 문안하니 “이미 병이 나았으니 문안하지 말라”라고 답하였다.
2월 21일 재신 이하가 문안하니 “평안하다”라고 답하였다.
3월 7일 의관들이 세자의 마비 증세에 침이 효험이 있다고 할지라도 또한 쑥으로 뜸을 떠서 후환을 막아야 한다고 하였다.그래서 뜸뜰 혈을 의논하여 손의 좌우측 곡지혈, 좌우측 족삼리혈과 절골혈에 의관 박태원과 박군이 모시고서 각각 뜸을 7장씩 떴다.
3월 10일 재신 강원, 의관이 문안하니 “평안하다”라고 답하였다.
4월 8일 어깨뼈가 당기는 징후가 있기 때문에 재신, 강원, 의관이 문안하니 “병이 그다지 대단하지 않다”라고 답하였다. 의관이 들어간 후 약을 의논하고 침놓을 자리를 의논하여 들였다. 침은 날씨가 좋지 않아 그만두고 약은 강활승습탕에 지각, 형개수, 술에 담갔다가 볶은 황금 각 7푼을 넣어 3첩을 조제하여 올렸다.
4월 10일 재신, 강원, 의관이 문안하니 “증세는 차도가 있으니 문안하지 말라”라고 답하였다.
5월 20일 의관에게 하령하기를 “더위를 견딜 수 없고 자주 갈등을 느껴 계속 물을 마시고 싶은데 쓴 약은 먹기가 어려우니생맥산을 올리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6월 4일 낮에 의관하게 하령하여 “뱃속이 불편한 증세가 있으니 약을 의논하여 바치라”라고 하였다.
재신, 강원, 의관이 문안하니 “알았다. 병은 그리 대단치 않으니 문안하지 말라”라고 답하였다.
평위산에 볶은 백작약, 적복령 각가 1돈, 지각, 길경, 향유 각 7푼을 넣어 3첩을 조제하였다.
6월 5일 재신, 강원, 의관이 문안하니 “알았다. 거의 나았으니 다시 문안하지 말라”라고 답하였다.
11월17일 오후에 세자가 의관을 불러 “새벽부터 오른쪽 눈이 시큰거리는 증세가 있다”라고 하령하였다. 의관이 나와서 말을 전하자 재신과 강원이 문안하니 “대단하지는 않다”라고 답하였다. 재신과 강원이 아뢰었다. “눈병은 증세가 미미하다 해도 서둘러 치료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의관을 불러들여 진찰하게 한 뒤 약 처방을 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세자가 “알았다”라고 답하였다. 세자의 방이 비좁아 의관만 들어가 진찰하였다. 의관 정지문과 침의 이득길이 들어가 진찰하고 나와서 말하였다. “오른쪽 눈의 흰자위가 매우 붉고 통증이 있으니, 이는 곧 두풍과 위열 증세입니다.” 서각음에 세폐산을 합하고 방풍과 형개수를 각각 1돈씩 더하고 생강즙에 담갔다가 볶은 황련을 5푼을 더하여 지은 약 3첩을 올렸다.
세자가 밤 2경에 의관을 불러 “눈알의 통증이 심하니 비로 밤이지만 침을 맞고자 하는데 어떠한가?”라고 하령하였다. 재신과 강원이 합문 밖에 급히 모여 아뢰었다. “밤이 깊으니 침을 맞아서는 안 됩니다. 내일 들어가 진찰한뒤 침 놓을 혈을 의논하기로 하고, 우선 염탕으로 씻는 것이 좋겠습니다.” 밤은 깊어 문안하지 못하였다.
11월 18일 문안하니 “염탕으로 씻은 뒤 통증이 조금 덜해졌다. 오시 무렵에 침을 맞겠다.”라고 답하였다.
오시에 재신과 강원이 의관과 더불어 침놓을 혈을 의논하고, 합문 밖에 나아가 침맞을 시각을 아뢰니 “통증이 차츰 사라지고 있고 날씨가 매우 추우니 오늘밤 증세를 더보고 나서 시행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령하였다.
11월 19일 세자가 편찮아 동지 망전레를 쉬었다. 재신, 강원이하 배종 신하들과 의관, 질자 등이 양궁에게 문안하니 “알았다”라고 답하였다. 재신과 강원이 이어서 아뢰었다. “밤사이 환후는 어떠하십니까? 앞서 지어 올린 약은 오늘로 끝나게 되는데, 증세를 상세히 안 뒤에 다시 약 처방을 의논하려 하므로 의관을 들여 진찰하게 하겠습니다.” 세자가“어제보다 조금 나아졌으니, 오늘 밤 증세를 다시 본 뒤에 내일 약 처방을 의논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답하였다.
11월 20일 문안하니 “차도가 없다. 문안하지 말라. 다만 왼쪽 눈에 또 통증이 조금 있다.”라고 답하였다. 의관이 들어가 진찰한 뒤 약 처방을 의논하여 서각음에 세폐산을 합하고 추가로 더 넣은 것 중에서 방풍과 형개를 뺀 뒤, 적복령 2돈,술에 담갔다가 볶은 적작약 1돈 5푼, 독활 1돈을 더 넣어 지은 약 3첩을 올렸다.
11월 21일 문안하니 “어제와 마찬가지이다”라고 답하였다.
11월 22일 문안하고 아뢰었다. “겨울에 침을 맞으시는 것이 불안하므로 우선 약을 올렸으나 오래도록 효험이 없으니, 오늘침놓을 혈을 의논한 뒤 침을 맞으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세자가 “알았다”라고 답하였다. 재신과 강원이 의관과 침놓을 자리를 의논한 후 침놓을 시각과 앉을 방향을 정하여 아뢰니 “알았다”라고 답하였다. 정오에 세자가남향하여 앉아 좌우측의 족삼리혈, 태충혈, 합곡혈, 신문혈, 풍지혈, 영향혈에 침을 맞았다. 보덕 조제계원과 의관정지문, 신가귀가 침을 잡았고 의관 이득길이 입시했다. 침을 맞은 후 재신, 강원, 의관이 문안하니 “알았다”라고답하였다.
11월 23일 문안하니 “어제와 마찬가지다”라고 답하였다. 이에 “어제 지어 올린 약을 오늘 다 잡수셨을 것이니 의관에게 명령하여 증세에 다라 가감하여 약을 지어 올리면 어떻겠습니까?”라고 아뢰나 “알았다”라고 답하였다. 세폐산에 시호와 청피 각 8푼과, 오줌에 담갔다가 볶은 향부자 1돈 5푼, 감국 2돈, 맥문동 1돈을 더하여 3첩을 지어 올렸다.
11월 24일 문안하니 “어제와 마찬가지다”라고 답하였다. 이에 “약이 뚜렷한 효험이 없으니 오늘부터 침을 맞아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아뢰니 “그것이 좋겠다”라고 답하였다. 정오에 세자가 남향으로 앉아 침을 맞았다. 좌우측의족삼리혈, 태충혈, 합곡혈, 신문혈, 풍지혈에 사서 조전소와 의관 정지문, 신가귀가 침을 놓았다. 침을 맞은 후 문안하니 “알았다”라고 답하였다.
11월 25일 문안하니 “이미 차도가 있으니 문안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에 “지어 올린 약이 오늘로 끝나는데, 더 지어 올려야 하겠습니까?”라고 아뢰니 “우선 며칠 기다리며 증세를 보아가며 짓는 것이 좋겠다”라고 답하였다.
11월 27일 문안하니 “이미 차도가 있으니 이후로는 문안하지 말라”라고 답하였다.
12월 5일 재신, 강원, 의관이 아뢰었다. “침과 약을 함께 썼는데도 오래 완쾌되시지 않고 요즘 날씨마저 추워 신들은 걱정을이기지 못하여 감히 문안드립니다.” “거의 회복되었지만 아무래도 남은 증세가 다 낫지는 않았다”라고 답하였다.
인조 20년(1642)
1월 1일 날이 밝기 전에 세자와 대군이 한의 궁정으로 나아가 한을 다라 동문 밖 성황사로 갔다. 잠시 후 한의 궁정으로 다라 돌아왔다. 도중에 말이 넘어졌으나 다치지는 않았다. 문덕문 안의 삼관묘에서 잠시 쉬었다. 빈객과 보덕이 “다치지는 않으셨으나 말이 넘어졌을 때 놀라셨을 우려가 있으니 의관을 불러 약을 쓰시기 바랍니다.”라고 아뢰었다.세자가 “혼잡할 때 뜻밖에 말이 넘어져 떨어졌으나 곧 일어나 말을 타서 조금도 다친 데가 없다. 아뢰는 말이 이와같으니 의관을 불러도 무방하다.”라고 답하였다. 관소에 있던 문학, 사서, 의관 정지문 등이 달려와 소합원 3알을술에 타서 한 잔 들게 하였다.
1월 2일 문안하고, 이어서 “어제 다치신 데는 없으나 어혈을 푸는 약을 몇 첩 쓰지 않을 수 없으니 다시 약을 의논하기를청합니다.”라고 아뢰니 “애초에 다친 데가 없고, 하루 밤 지났는데도 편안하니 약을 의논하지 말라”라고 답하였다.
2월 15일 진시에 청인이 사냥 군졸을 풀어 서남쪽을 향하여 나아갔다. 말이 또 넘어져 세자가 또 떨어졌으나 상처가 대단하지 않았으니 천만다행이었다. 강원과 의관이 문안하니 “다치지는 않았다”라고 답하였다. 강원이 의관과 상의하여소합원을 드시기를 청하였다. 곧 5알을 갈아 소주에 섞어 드시게 하였다.
2월 23일 문안하니 “알았다”라고 답하였다. 이어서 “여러 번 말이 넘어지는 바람에 떨어져서 놀라셨으므로 뚜렷하게 다치신 증후는 없다 하더라도 어혈을 풀고 병을 막는 약을 드셔야 합니다. 의관에게 약을 의논하게 하시기를 청합니다”라고 아뢰니 “알았다:”라고 답하였다.
3월 13일 세자가 의관에게 하령하였다. “요즘 비위가 약해져 속이 울렁거리고 토할 것 같은 증세가 있고 두 다리도 제법 시리고 아프니 아마도 낙상하여 그런 것 같다. 약을 먹거나 침을 맞아 어혈과 울결증을 예방하지 않으면 안 될 듯하다.” 재신, 강원, 의관이 문안하니 “그리 대단치 않으니 문안하지 말라”라고 답하였다. 이에 “의관에게 내일 아침일찍 들어와 진찰한 뒤 약을 짓게 하십시오”라고 아뢰니 “알았다”라고 답하였다.
3월 14일 의관 정지문과 이득길이 진찰하였다. 마치고 나와 약을 상의하여 오줌에 담갔다가 볶은 향부자 1돈과 술에 담갔다가 볶은 백작약 7푼, 사인 4푼, 목향 3푼을 넣은 육군자탕 5첩을 지어들이고, 도인도 달여서 함께 올렸다.
3월 17일 초저녁에 의관을 불러 하령하였다. “지어 올린 약을 이미 3첩이나 먹었지만 효과가 없다. 뱃속이 꼬이는 듯 아파편치 않고, 갈비뼈 아래는 당기면서 아픈 증세가 있는 듯하다. 어혈이 움직여 병이 생긴 것인가, 약이 증상에 맞지않는 것인가? 발의 통증은 멎었다.”
3월 18일 문안하고 이어서 아뢰었다. “어제 의관에게 내린 명령을 받고 걱정을 이기지 못하여 신들이 의관과 더불어 상의해보았는데, 의관들이 말하기를 ‘비위가 습하고 열이 나며 담증이 있어서 배가 편치 못한 증세가 생긴 것입니다. 지어 올린 약은 이 증세에 가장 잘 듣지만, 여러 날 먹은 뒤에야 비로소 효과를 느낄 수 있으니, 4∼5첩으로는 효과를보기 어렵습니다. 앞의 처방에 당귀 1돈을 더하여 어혈을 다스려 피가 잘 돌게 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감히이렇게 여쭙니다.” “알았다. 그대로 약을 지으라”:라고 답하였다.
3월 19일 육군자탕에 전처럼 가미하고 술로 씻은 당귀 1돈을 더하여 6첩을 지어 올렸다.
3월 21일 문안하니 “알았다. 이미 차도가 있으니 이후로는 문안하지 말라”라고 답하였다.
9월 13일 의관에게 하령하였다. “머리에 바람이 들어 온 몸이 춥고 오그라지는 것 같으며 또한 전에 앓던 어지럼증이 요즘 제법 심하니 무슨 까닭인가?” 재신, 강원, 의관, 질자 등이 문안드리고 이어서 아뢰었다. “지금 의관에게 하령하신 것을 듣고, 삼가 편찮으심을 알게 되어 염려스럽습니다. 열을 내리고 현기증을 고치는 약에 대해서는 의관에게 약을 지어 들이게 하십시오. 어지럼증은 더욱 예방하지 않으면 안 되므로 감히 이 같이 아룁니다. 또 빈궁에게 약을 들이는 일을 중지하라는 하교가 있었는데, 지금은 증세가 어떠한지 몰라 아울러 감히 여쭙니다.” 세자가 답하였다. “감기는 그리 대단치 않다. 며칠 간 증세를 보아가며 조치하겠다. 현기증은 마땅히 대조의 어의들에게 두루 상의하여 약을 쓰도록 하겠다. 빈궁이 약을 끊은 것은 별다른 뜻은 없고 입이 써서 잠시 쉬는 것이니, 이 또한 마땅히 증세를 보아가며 조치하겠다.”
9월 14일 편찮은 증후가 조금 있으므로 내일 망전례를 쉬는 것이 어떠한지 여쭈니 “알았다”라고 답하였다.
9월 15일 내일 서연은 기후가 편찮으므로 쉬는 것이 어떠한지 여쭈니 “알았다”라고 답하였다.
9월 18일 연일 편찮은 기미가 있으므로 며칠 간 서연을 쉬는 것이 어떠한지 여쭈니 “알았다”라고 답하였다.
9월 24일 보덕 박사가 아뢰었다. “이곳은 기후가 한랭하여 샘물도 짜고 차서 여염집 사람이라도 겨우 1년 정도만 지내면 병이 나게 됩니다. 하물며 세자께서 곤경을 당하여 이곳에서 6년이나 되셨으니, 그간의 갖은 고초와 거처 및 음식의 불편함으로 인해 병이 나실 만한 까닭이 정말로 한두 가지가 아닐 것입니다. 비록 춘추가 한창이시고 옥체가 강건하시다 하더라도 속에서 점점 쌓이다 보면 어찌 상하는 데가 없겠습니까? 아직 뚜렷이 아픈 곳이 없다고 하여 조금이라도 가벼이 여기는 뜻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근자에 어지럼증이 수시로 일어난다고 들었는데, 뒤이어 기침하시는 기색이 평소와 많이 다른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것이 우연히 그렇게 되신 것인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은 이 병에 대하여 이미 경험이 많습니다. 호랑이에게 물려본 끝이라 그 놀라움과 염려가 참으로 깊습니다. 신은 일찍이 정지문으로 하여금 이곳의 물과 풍토를 자세히 논하고 현기증을 치료할 처방을 작은 종이에 적게 하여 항상 눈여겨보는 자료로 삼아왔습니다. 이제 이것을 우러러 올리니 곁에 두고 한 번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삼가 바라건대, 병을 조심하라던 옛 사람의 가르침을 본받아 예방할 방도를 생각하십시오.”
10월 4일 봉황성으로 나가라는 말을 듣고 재신과 강원이 경황 중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용골대 장군이 아문에 도착하기를 기다려 우선 내보내는 이유를 물은 다음 또 세자께서 평소에 앍고 있는 산증이 수시로 발작하여 엄동에 멀리 행차하는 일에 대한 민망하고 답답한 심정을 말하고자 하였다.
10월 10일 이른 아침에 재신과 강관이 문안하였다. 밤부터 조금 편찮은 증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단치 않다”라고 답하였다.
10월 29일 “몸이 조금 좋지 않은 듯하니 내일 망전례는 쉬겠다”라고 하령하였다. 보덕 박사가 차비문 밖으로 나아가 문안드린 후 아뢴 말이 있었다.
11월 1일 문안하니 “마침 감기 기운이있으나 대단한 것은 아니다”라고 답하였다. 이어서 약을 상의할 것을 청하니 “약을 상의하지는 말고 인삼과 금은화 두 약채로 1첩을 지어 들이라”고 하였다.
11월 2일 문안하니 “아픈 것은 대단치 않고 지금은 이미 조금 나아졌으니, 문안하지 말라”라고 답하였다.
인조 21년(1943)
12월 12일 지난 밤 세자가 의관 박군을 안으로 불러들여 하령하기를 “기가 매우 고르지 못하고 오한 때문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으니 물러가 보덕가 상의하여 약을 지어 들이라”라고 하였다. 재신과 강원의 문안은 번거로울 듯하니 하지말라는 뜻을 또 전하였다. 즉시 삼소음을 지어 들였다.
세자의 미령한 증세가 낮이 되자 더욱 심해졌다. 의관 박군과 채득기를 불러 진찰하게 하니, 오한과 번열이 나고 머리와 눈이 어지럽고 입이 말라 물을 자주 마시는 것으로 보아 찬바람 때문에 심한 감기에 걸린 듯하다고 하였다. 즉시 가입인삼강활산 첩을 지어 올렸다.
저녁에 문안하니 “낮보다는 조금 덜하다”라고 답하였다.
12월 13일 아침 일찍 문안하니 “어제보다는 훨씬 낫다”라고 답하였다.
식후에 재신, 강원, 약방이 합문 밖에 나아가 의관을 불러 진찰을 받으라고 청하자 “증세가 이미 멎었으니 들어와 진찰할 필요는 없다”라고 답하였다. 재신과 강원이 또 아뢰기를 “증세는 비록 조금 나아졌다 하더라도 필시 남은 증세가 있을 것이니 들어가 진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자 “누워 있는 방이 비좁으니 의관만 들어와 진찰하게 하라”라고 답하였다.
의관 박군과 채득기가 들어가 진찰하였다. 증세가 어제보다는 훨씬 멎었다고 하였다.
저녁에 문안하니 “아침과 같다”라고 답하였다.
12월 14일 아침 일찍 문안하고 이어서 약을 상의하겠다고 다시 청하자 “몸이 어제보다 훨씬 편안하니 약을 상의하지 말라”라고 답하였다. 재신과 강원이 아뢰기를 “비록 조금 나았다고 하더라도 필시 남은 증세가 있을 것이니, 의원으로 하여금 다시 문후하고 약을 상의하여 지어 들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그렇다면 그렇게 하라”라고 답하였다. 의관 박군과 채득기가 문후하고 물러나 상의하여 화개산 2첩에 가미한 약을 지어 들였다.
인조22년(1644년)
3월 8일 세자가 며칠 전부터 감기 기운이 약간 있었지만 미처 알지 못하다가 이날 초저녁 의관에게 하령한 것으로 인하여 재신, 강원, 의관이 문안하니 “대단하지 않다”라고 답하였다. 이날 밤에 가입인삼강활산을 지어 올렸다.
3월 11일 아침 문안을 하니 “평안하다”라고 답하였다. 세자의 기후에 차도가 있었다.
4월 11일(서행) 이날 저녁에 세자가 감기 기운이 있고 차츰 설사도 하였다. 불환금정기산에 다른 약재를 넣어 약을 지어 올리고 자기 전에 복용하게 하였다.
4월 12일(서행) 문안하고 앞서 올린 약을 계속 올리겠다고 아뢰니 “밤사이 회복되어 지금은 아픈 곳이 없으니 약을 더 올리지 말라”라고 답하였다.
6월 21일 오후에 의관 등에게 하령하였다 “요즘 머리와 손발에 번열이 나는지 불편한 기미가 약간 있다. 먹는 약이 입에 쓰니 몇 군데 중요한 혈을 가려 침을 놓는 것이 어떠한가?”
6월 22일 재신, 강원, 의관이 문안하고 이어서 아뢰었다. “어제 의관에게 하령하신 말씀을 들으니, 옥체가 편찮으시다 하니 이것은 필시 말을 타고 달린 나머지 힘이 들어 생긴 것입니다. 빨리 약을 지어야 한다는 뜻을 감히 아룁니다.” 세자가 “알았다. 약을 짓는 일은 며칠 살펴보고 하는 것이 좋겠다”고 답함
6월 23일 문안하고 “밤사이 살피지 못하였는데 증후는 어떠하십니까?”라고 아뢰니 평안하다라고 답하였다.
6월 24일 세자가 침을 맞을 시각인 사시 초에 강원에 하령하여 입시하지 말라고 하였다. 침의 최우량이 발의 곤륜혈과 삼리혈, 손의 후계혈, 중저혈, 신문혈 등 10군데 혈에 침을 놓았따. 침을 맞은 후 재신과 강원이 문안하였다. 전 정승 최명길과 이경여, 전 판서 김자점의 질자 김식 등도 문안하니 “알았다”라고 답하였다.
7월 3일 세자가 며칠 전부터 감기가 들어 편찮은 기미가 있으므로 의관에게 약을 지어 바치라고 하령하였다. 재신, 강원, 의관이 문안하니 “증세가 대단치 않으니, 문안하지 말라”라고 답하였다.
재신과 강원이 아뢰었다. “삼가 의관 등에게 하령하신 내용을 듣고서 증세에 대해 곧바로 의관과 상의하였더니, 의관이 ‘인삼패독산에 소금과 술에 담갔다가 볶은 지모 1돈, 갈근, 볶은 편금, 향유 각 5푼, 소엽 3푼을 넣어 연달아 2∼3첩을 드시고 땀을 흘려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약을 지어 올린다는 뜻을 여쭙니다.”
7월 4일 밤사이에 자못 차도가 있었다고 답하였다
7월 6일 탕약을 올리는 일을 중이하였다.
7월 28일 세자가 한기를 느끼고 왼쪽 어깨와 팔이 마비되면서 당기고 아픈 증세가 있었다. 신시에 하령하여 침을 맞았는데 강원은 입시하지 말라고 하였다. 의관 이호검, 정후계, 최우량이 입시하여, 정후계가 침을 놓았다. 오른속의 지구혈, 곡지혈, 신문혈과 오른발의 절골혈, 곤륜혈 등에 각각 침을 1대씩 맞았다. 침을 맞은 후 문안하니 “알았다”라고 하였다.재신과 강원이 아뢰었다. “삼가 의관에게 내리신 영을 받들어 즉시 의관 등과 약을 상의하니, 오적산에 강활 1돈, 오약 7푼, 형개수 5푼, 자소엽 3푼을 더한 약 2∼3첩을 계속 복용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약을 지어 올린다는 뜻을 감히 아룁니다.” 이에 “한번 복용해 볼 테니, 일단 지어 들이도록 하라”라고 답하였다.
7월 29일 문안하고 이어서 “침을 맞으신 후 밤사이 기후가 어떠하십니까? 어제 지어 올린 탕약은 이미 복용하셨습니까?라고 아뢰었다. 이에 ”알았다. 약은 오늘 아침에 달여서 복용하고자 한다“라고 답하였다.
미시에 세자가 어제 점찍어 둔 혈에 침을 맞았다. 침을 맞은 후 재신과 강원이 문안하니 “알았다”라고 답하였다.
인조23년(1645)
2월 30일 왕세자가 남별궁 서연청 안의 중문에 이르자 세 칙사가 모두 섬돌을 내려와 맞이하고 서연청 위에 오르자 동서로 나뉘어 차례대로 섰다 (중략)
제 6작에 이르러 잔을 올리려 할 때 칙사가 말하였다 “세자께서 미령하신 몸으로 오래 앉아 계시니 마음이 매우 편치 않습니다. 맛있는 안주와 좋은 술에 이미 취하고 배부르니 후의의 정중함을 더욱 느낍니다. 속히 파하기를 청합니다.” 세자가 말하였다. “몸에 병이 있으나 요즘은 자못 나아졌고, 또 대인의 기뻐하는 모습을 대하니 깊은 병이 몸에서 떨어진 듯 피곤한 줄도 모르겠습니다. 예를 다한 뒤에 파하기를 청합니다”
3월 4일 *앞부분 생략 제3사가 말하였다. “방금은 저희가 미처 꺠닫고 살피기도 전에 세자께서 자리를 떠나 차를 돌리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안색을 뵈니 자못 피곤하고 미령하신 기색이 있어서 너무나 미안합니다. 이제부터는 자리에 앉은 채 술을 돌리시고 자리를 떠나시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세자가 말하였다. “오늘은 멀리 떠나는 날이고, 또한 병이 나아가고 있으니 한 번 술을 돌린다고 무슨 방해될 것이 있겠습니까? 또한 주상께서 또 중신을 보내 한 잔씩 드리는 것이니 대인은 사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중략) 칙사가 또 물었다. “주상의 위예하신 기후는 지금 어떠하십니까?” 세자가 말하였다. “침과 약을 함께 쓰고 있으나 아직 뚜렷한 효험이 보이지 않습니다.” (중략) 세자가 말하였다. “약을 먹고 조리하여 이미 차도가 있으니 대인은 염려 말고 잘 가기 바랍니다.” 칙사가 말하였다. “이제 병환이 나아가고 있다는 말씀을 들으니 기쁘고 경하하는 마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3월 6일 세자가 침을 맞은 뒤에 본원 전원이 문안하니 “알았다”라고 답하였다. 침을 맞을 때 입시한 사람은 겸필선 신익전, 설서 장차주, 의관 최득룡, 이형익, 박태원, 박군이었다. (침을 놓은 사람은 박태원이었다.) 침을 맞은 혈은 좌우측 간사혈, 좌우측 태연혈, 좌우측 신문혈, 좌우측 행간혈, 좌우측 내정혈, 좌우측 신맥혈, 좌우측 임읍혈이었다 약방이 상번 겸필선 신익전에게 청하여 문안하지 “알았다”라고 답하였다.
3월 8일 세자가 침을 맞은 뒤에 본원 전원이 문안하니 “알았다”라고 답하였다. 백관이 상번겸필선 신익전에게 청하여 문안하니 “알았다”라고 답하였다. 약방이 하번 설서 장차주에게 청하여 문안하니 “알았다”라고 답하였다. 침을 맞을 때에 입시한 사람은 겸보덕, 김익희, 설서 장차주, 의관 최득룡, 이형익, 박태원, 박군이었다. (침을 놓은 사람은 박태원이었다)
3월 10일 사시 정각에 세자가 침을 맞은 뒤에 본원 전원이 문안하니 “알았다”라고 답하였다.
침을 맞을 때 입시한 사람은 겸필선 신익전, 겸설서 이태연, 의관 최등, 박태원, 이형익, 박군이었다. (침을 놓은 사람은 박태원) 침을 맞은 혈은 손의 좌우측 간사혈, 좌우측 태연혈, 좌우측 신문혈과 발의 좌우측 행간열, 좌우측 내정혈, 좌우측 신맥혈, 좌우측 임읍혈이었다.
3월 13일 사시 정각에 동궁이 침을 맞은 뒤 본원 전원이 문안하니 “알았다”라고 답하였다.
침을 맞을 때 입시한 사람은 겸필선 신익전, 장차주, 의관 이형익, 최득룡, 박태원 박군이었다 (침은 박태원이 놓음) 손의 좌우측 간사혈, 좌우측 태연혈, 좌우측 신문혈과 발의 좌우측 행간혈, 좌우측 내정혈, 좌우측 신맥혈, 좌우측 임읍혈이었다.
3월 14일 사시 정각에 동궁이 침을 맞은 뒤 본원 전원이 문안하니 “알았다”라고 답하였다.
침을 맞을 때 입시한 사람은 겸필선 신익전, 장차주, 의관 이형익, 최득룡, 박태원 박군이었다 손의 좌우측 간사혈, 좌우측 태연혈, 좌우측 신문혈과 발의 좌우측 행간혈, 좌우측 내정혈, 좌우측 신맥혈, 좌우측 임읍혈이었다.
3월 18일 약방이 임금에게 아뢰었다. “왕세자의 증세는 전에 의원들의 말에 따라 10여일 동안 조용히 조섭하면서 증세를 천천히 살펴서 다시 합당한 약을 의논하겠다는 뜻을 들어와 아뢰고 윤허를 받았습니다. 곧바로 최득룡, 유후성, 박군 등으로 하여금 앞서 넌지시 굳로 여쭙게 하였더니 ‘심한 천식, 가슴이 답답한 증세, 정신 못 차릴 정도의 피곤함 등의 증세가 며칠 전부터 더해졌다’고 합니다. 신들이 최득룡 등 3인과 상의해보니 모두 ‘이러한 증세는 모두 폐에 열이 나는 것에 속하므로 화기를 다스려 기운을 내리는 처방을 써서 폐의 열을 쏟아내면 여러 증상이 저절로 물러갈 것이므로 청폐탕에 지모 8푼을 더하여 연달아 10첩을 쓰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지어들이겠다는 뜻을 감히 아룁니다. ” “알았다”라고 답하였다.
3월 23일 약방이 필선 안시현에게 청하여 문안하니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알았다. 요즘 숨찬 증상과 천식 증상이 이전에비해 더 한 것 같고, 새벽이 오면 답답증이 심하고 머리가 아파 잠자리가 편치 않다가 물로 씻고 나면 약간 누그러진다. 또한 옆구리가 당기고, 가슴이 응어리지고 답답한 증세가 때때로 발작하는데, 청심원을 먹으면 진정되는 듯하다. 잠자리에 들 때 죽력과 생강즙을 먹은 밤에는 잠자리가 편한 것 같은데, 그렇지 않으면 편치 않다.”
필선 안시현, 설서 장차주, 겸설서 이태연이 승언색을 통하여 아뢰었다. “삼가 약방에 답하신 하령을 받드니, ‘증세가 전에 비해 더하다’고 하셔서 걱정스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감히 와서 문안드립니다.” “알았다. 증세가 그대로남아서 아직 회복되지 않고 있다”라고 답하였다.
3월 24일 “증세는 여전하다. 의관으로 하여금 입진하게 하라”
3월 25일 “증세는 더하거나 덜함이 없다.”
3월 26일 본원 전원이 문안하니 “알았다”라고 답하였다. 약방이 상번 필선 안시현에게 청하여 문안하니 “알았다.” 증세는더하거나 덜함이 없다. 지어 들인 약 1첩은 이미 복용하였다”라고 답하였다.
4월 1일 문안하니 “알았다. 증세는 전보다 덜한 것 같다. 의관이 입진하는 일은 알았다”라고 답하였다. 입진한 의관은 최득룡, 박태원, 박군이었다.
4월 6일 약방이 상번 문학 윤집에게 청하여 문안하니 “천식과 기침은 잠시 그친 듯 하나, 나머지 증상은 아직 다 낫지 않았다”라고 답하였다.
4월 11일 문안하고 아뢰었다. “전에 지어 들인 탕약은 어제 이미 다 복용하셨습니다. 일찍이 이 탕약을 다 복용한 뒤에 다시의논하여 탕약이나 환약으로 지어 들이라고 하셨습니다. (…) 입진한 뒤에 그 여부를 의논하여 정해야겠기에 감히여쭙니다. 세자가 답하였다. ”증세는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으며 또 다른 증상은 없다. 전에 내린 증록을 (…) 의논하고 정하여 지어 들이는 것이 좋겠다.
4월 18일 문안하니 “알았다. 옆구리가 아프고 식사 뒤에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피곤하고 뱃속이 불편한 증상은 여전하고현기증은 전보다 더 심해졌다.”라고 답하였다.
본원의 상번과 하번이 문안하니 “알았다. 현기증이 매우 심하여 몹시 괴롭다.”라고 답하였다.
4월 22일 (…) “신들이 곧바로 (…) ‘이것은 분명 감기입니다. (…) 말린 칡과 지모 1돈씩, 술에 담갔다가 볶은 황련과 볶은 치자씨를 7푼씩 넣은 소시호탕 3첩을 복용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지어 들이겠다는 뜻을 감히
아룁니다.” “알았다”라고 전교하였다.
4월 23일 아침 문안하니 “알았다. 증세는 어제와 다름이 없다”라고 답하였다.
사시 정각에 대전이 침을 맞은 뒤에 본원의 상번과 하번이 문안하니 “알았다”라고 답하였다.
약방이 사서 유경창에게 청하여 문안하며 “삼가 듣건대 추워서 떨고 난 뒤에 아직도 열기가 있다고 하여 지극히걱정스러움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입진한 의관들은 학질이 틀림없다고 하니 내일 새벽에 먼저 침을 놓은 뒤에 다시 의관들과 상의하나 뒤에 약을 의논하겠다는 뜻을 감히 아룁니다.”라고 하니 “알았다. 침 맞는 일도 또한 알았다”라고 하였다.
약방이 임금에게 아뢰었다. “오늘 정오쯤에 세자가 다시 추워 떠는 증세가 있어서 박군과 이형익 등에게 입진하도록 하였는데, ‘지난 21일 밤에 갑자기 추워 떨었고, 오늘 또한 그러하니 학질 증상이 틀림없습니다. 먼저 내일 이른아침에 침을 놓아 학질의 열을 빼내고 다시 증세를 보아 약을 의논하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형익으로 하여금 이에 따라 때에 맞추어 들어와 침을 놓게 하겠다는 뜻을 감히 아룁니다.” “알았다.”라고 답하였다.
4월 24일 새벽에 문안하니 “알았다. 밤에 열이 심하여 한숨도 못 잤다”라고 답하였다.
인시 정각에 세자가 침을 맞을 때에 입시한 의관은 박군, 이형익, 이섬이었다. (침은 이형익이 잡았다.) 침을 맞은 혈은 간사혈과 (십삼귀혈의) 제1혈∼제13혈이었다. 본원의 상번과 하번은 입시하지 말라는 하령이 있었다.
침을 맞은 뒤에 안시현, 유경창, 장차주가 문안하니 “알았다”라고 답하였다. 약방이 필선 안시현에게 청하여 문안하니 “알았다. 밤새 번열 때문에 자지 못하였다.”라고 답하였다.
약방이 임금에게 아뢰었다. “왕세자가 지난 21일 밤에는 갑자기 추워 떨다가 시간이 지나서 그쳤고 22일에는 기후가 평소 같았습니다. 23일 사시 말에 다시 추워 떠는데, 갖옷을 겹으로 입어도 추워 움츠러드는 것을 막을 수 없다가 저녁 때가 되어서야 추운 기운이 풀렸으나 번열이 계속되어 정신이 혼미해졌다가 청심원을 복용하고 나서 조금 진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열기가 아직 물러가지 않아 밤새 시달리며 침소에 들지 못하였고, 목 마른 증세도 심하여 정화수를 올려도 조금도 그치치 않았으며, 천식이 거칠고 급하여 편히 눕지도 못하였습니다. 이 증상을 가지고 유후성과 박군 등 어의들에게 문의하니 ‘먼저 시호지모탕에 껍질과 함께 볶은 치자와 생강즙에 담갔다가 볶은 황련 1돈씩과 소금물에 담갔다가 볶은 황백 5푼을 더해 3첩을 먼저 쓰고 나서 증세를 보아가며 다시 의논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지어들이겠다는 뜻을 감히 아룁니다.” “알았다”라고 전교하였다.
4월 25일 새벽에 무안하니 “어제 밤에는 아침까지 앉아서 겨우겨우 보냈다. 오늘 밤에는 비록 앉아서 밤을 새우기는 했지만 어제보다는 조금 덜한 것 같다”라고 답하였다.
오늘 침을 맞을 때에 상번과 하번이 입시할지 여쭈니 “거처가 좁으니 전처럼 들어오지 말라”라고 답하였다
익시 정각에 세자가 침을 맞을 때 입시한 의관은 박군, 이형익, 이득길이었다. (침을 놓은 사람은 이형익이었다.) 침을 맞은 혈은 간사혈과 (십삼귀혈의) 제1혈∼제13혈이었다.
침을 맞은 뒤에 안시현, 유경창, 장차주가 문안하니 “알았다”라고 답하였다.
4월 26일 문안하니 “알았다”라고 답하였다.
약방이 임금에게 아뢰었다. “방금 왕세자의 증상을 가지고 최득룡에게 물어으니, ‘상한이 풀리지 않은 지 오늘로 엿새가 되었으니, 소시호탕에 말린 칡, 지모, 술로 씻은 생지황, 지골피 1돈씩과 술에 담갔다가 볶은 황련, 볶은 치자 7푼씩과 소금과 술에 담갔다가 볶은 황백 5푼을 더하여 연달아 3번 복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고 하였습니다. 이같이 지어 들이겠다는 뜻을 감히 아룁니다.” “알았다”라고 답하였다.
진시 정각에 세자가 기운이 급박하고 막히는 증세를 보이자 약방동제 홍서봉, 제조 남이웅, 부제조 김광욱과 의관 이형익, 최득룡, 유후성, 박군 이하 전원이 문정문 밖으로 나왔으며, 어의 등은 그대로 안으로 들어가 시병하였다. 소조중탕 1첩을 복용한 뒤에 본원의 상번과 하번인 필선 안시현과 사서 유경창이 문안하니 “알았다”라고 답하였다.
승언색을 통하여 증세가 어떠한지 물어보니 승언색이 “약을 올린 뒤에 담화가 조금 내려서 잠시 진정된 듯하지만 오르고 내리는 것이 일정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의관 박태원에게 물어보니 “약을 올린 뒤로 식은 땀을 많이 흘려 두터운 솜옷이 흥건히 젖을 정도여서 옷을 갈아입고자 의원들을 잠시 나가 있게 하라고 하령하셨으며, 증세 또한 잠시 그친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사시 초에 대전이 침을 맞은 뒤에 안시현, 오빈, 유경창, 장차주가 문안하니 “알았다”라고 답하였다.
약방이 임금에게 아뢰었다. “왕세자의 증세가 가볍지 않아서 혹 담화가 불시에 올라갈 때가 있으니 급한 일에 대처할 방도를 미리 생각해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부터 어의 최득룡, 유후성, 이형익, 박태원 등이 차도가 있을 때까지 궐내에서 입직하고, 제조 1원 또한 돌아가며 숙직하겠다는 뜻을 감히 아룁니다.”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오시 정각에 왕세자가 창경국 환경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대전이 세자궁의 사약을 통하여 보덕 서상리, 안시현, 오빈, 유경창, 장차주에게 “더 이상 가망이 없으니 망극하다”라고 하교하였다.
인조 15년(1637)
3월 8일심양 가는 길 왕세자께서는 어제부터 감기 기운이 약간 있으셔서 저희들과 의원들이 서로 의논하여 약을 올려 드시게 하였더니, 오늘 아침에는 어느 정도 좋아지신 것 같았습니다. 병세는 대단하지 않지만 봄날씨가 아직도 차고 야외에서 머물 때가 많아서 매우 염려됩니다.
3월 13일 세자께서는 전날 감기 기운이 있으셔서 약을 세 차례 복용하신 뒤에 곧 회복하셨습니다.
9월 16일심양 생활 후 왕세자와 빈궁은 평안하시온데, 며칠 전 황제가 사냥을 나갔다 돌아올 때 세자께서 대권문 밖에서 맞이하셨습니다. 궁을 나오다 발을 헛디뎌서 다치셨으나 침을 두 번 맞으신 뒤에 곧 나으셨습니다.
인조 16년(1638)
2월 18일 왕세자와 빈궁은 평안하시되, 세자께서 지난해 여름부터 때때로 잠시 현기증이 있어서 혹은 괜찮다가 혹은 발병하시는데 대단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약을 올리는 것을 싫어하시므로 보고 드리지 않았습니다. 환절기 이전의 증세가 때때로 발병합니다. 이국땅에서 약재 또한 구하기 어려워 극히 민망한 일입니다.
2월 26일 세자께서 눈이 어질어질하고 머리가 흔들리는 증세는 아직도 회복되지 않아서, 의관들과 상의하여 오늘부터 먼저 침을 놓고 증세를 보아서 약을 올리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3월 7일 세자께서는 현기증으로 침을 다섯 번 맞으셨습니다. 원래 증세가 비록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아직도 쾌차하지 못하여 극히 걱정스럽습니다.
3월 18일 왕세자께서는 눈이 어질어질한 증세로 침을 일곱 번 맞고 증세가 그쳤습니다. 비록 완쾌하지는 못했지만 제법 효과가 있는 듯합니다.
3월 24일 왕세자께서는 17일부터 잠시 감기 증세가 있으셨으나 약 몇 첩을 드시고서는 쾌차하셨습니다.
4월 18일 세자께서는 전부터 산증의 조짐이 있었는데, 15일 밤부터 갑자기 곽란 증세가 있더니 산증으로 도져서 증세가 가볍지 않습니다. 약과 침, 뜸을 올렸으나 쉽게 효험이 나지 않아 극히 걱정됩니다.
4월 21일 이달 18일 유림이 나갈 때 왕세자의 건강이 좋지 못한 것은 이미 보고드렸습니다. 당초의 증세는 가볍지 않았는데 약을 올리고 침과 뜸을 놓은 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저께 저녁에는 산기가 다시 발동하였으나 침과 뜸을 들여서 통증이 즉시 멈추었으며 재발하지 않았습니다. 저번에 비해서 훨씬 빨리 나았습니다.
황제께서 세자의 미령하심을 듣고는 용, 마 두 사람으로 하여금 날마다 와서 안부를 묻게 하였습니다. 어제는 용장군이 저를 예부로 불러 무릎을 맞대고 말하기를, “세자의 증후를 즉시 황제께 말씀드렸더니 황제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세자의 병환이 비록 산증이라고는 하나 병의 뿌리는 필시 근심 때문이니 심히 염려스럽다. 여기서 마음을 편히 하고 있으면 훅 훗날 좋은 일이 생길 것이나 만약 근심한다면 이익도 없이 해로울 뿐이다. 국왕이 세자의 병이 중하다고 들으면 또한 반드시 걱정하여 피차 함께 마음이 상하게 될 것이니 또한 좋지 않은 일 아닌가? 들으니 조선의 법제에 세자는 평상시에 대궐문 밖을 나가지 않는다고 하는데 여기서 다르니 혹 강가나 사찰 등에 출입하여 마음을 푸는 것이 좋겠다.’” 하기에 저 박로가 대답하였습니다.
“황제께서 마음을 써주심이 여기까지 이르니 은혜로움에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세자께서 들어오신 후 황제의 은혜가 기대 이상인데 어찌 여기 있는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다만 세자께서 저희 나라에 있을 때 잠시도 부왕 곁을 떠나 있지 않았는데 지금 서로 멀리 있게 된 것이 이미 반년이 되었으니 지극한 정에 어찌 근심이 없겠습니까? 하물며 증세가 가볍지도 않으니 병중에 어버이를 그리워하는 것은 인정상 필연이니 저희 또한 이를 염려하고 있습니다. 강가에서 심심소일하는 것은 황제의 뜻이 곡진한 마음에서 나왔을지라도 출입이 강 건너는 것같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황제의 명이 이와 같으시니 감히 하나하나 아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용장군이 말하였습니다.
“세자가 병을 앓은 후 황제께서 극히 마음 아파하여 나를 시켜서 박시랑을 불러 타이르도록 하셨기에 이같이 말한 것뿐이오.”
4월 26일 이달 21일에 사은사가 나갈 때, 왕세자께서 편치 않으심은 이미 보고드렸습니다. 그후 증세가 조금도 차도가 없고산기는 비록 재발하지 않았으나 오른쪽 겨드랑이 밑에 맺힌 것이 있어 크기가 손바닥만 하며 고통스럽게 합니다.약물은 입에 대지도 못하고 오직 침과 뜸으로 다스리고 있는데 쉽게 효험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비장과 위가 상하여 드실 생각이 도무지 없을 뿐 아니라 비록 혹 드시고 싶어하는 음식물이 있어도 여기서는 찾을 수도 없어 극히걱정되어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싱싱한 배 같은 것은 더욱 드시고 싶어하시므로 금군 최득남 등을 따로 의주로 내보내어 부윤에게 말하여 찾아오라고 하였습니다.
의관 김진성, 박군, 유달 등이 약을 받들고 있으나 약물은 올릴 수가 없으므로 약을 맡은 의관은 속수무책입니다.오직 유달 한 사람이 침과 뜸을 담당하고 있는데 혈을 의논할 때 같이 상의할 사람이 없어 몹시 변변치 못합니다.또한 증후가 혹은 덩어리진 것이 있어 열흘이나 보름 사이에는 효험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침과 약을 모두 알고 또한 경험이 많기로는 유후성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급속히 보내어 함께 약을 받들도록 하는것이 옳은 일이니 내국에 명하여 처리하도록 하십시오.
4월 29일 이달 26일 이계영 등이 나갈 때 왕세자의 병세는 이미 보고드렸습니다. 그후 증세가 날로 나아지고 있으나 겨드랑이 밑에 응어리진 것은 아직 다 풀리지 않았으며 신열이 때때로 왔다갔다하며 음식도 맛이 없으시다 합니다. 혹드시고 싶어하는 것이 있어도 이곳에서는 도무지 구할 길이 없어 지극히 애가 탑니다. 왕세자께서 건강을 회복하시는대로 보고드리겠습니다.
5월 10일 지난달 29일 역관 조효신이 나갈 때 왕세자의 병세는 이미 보고드렸습니다. 그후 증세가 계속 심해져서 다른 증세도 겹쳐 나타나며, 신열이 왔다갔다하고 음식은 거의 폐하셨으며 잠도 편히 주무시지 못합니다. 겨드랑이 밑에 응어리가 진데다 아랫배 아픈 증세가 위로 올라가 찌르는 증세가 있었는데 오로지 침과 뜸에만 의지하여 이미 다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열이 냉증을 끌고 와서 설사가 났는데 도수가 빈번하며 입맛도 매우 씁니다. 침과 뜸으로 다스리는 것이 불가하므로 억지로 약을 올리는 사정을 갖추어 말씀드렸습니다. 지금은 약재를 달여 올리고 있습니다.
세자께서 편치 않으신지 거의 한 달이 되었으며 원기가 크게 상하고 울화가 날로 더하여 수라를 다 폐하고 단지 미음만 올리고 있습니다. 올리고 싶은 음식이 있어도 이곳에서는 도무지 구할 길이 없어 극히 애가 탑니다. 설사병의도수는 어제부터 조금 줄었으나 병세는 일정하지 않습니다. 며칠 동안 상태를 보아서 다시 보고 드리겠습니다.
5월 18일 이달 10일에 내관 김희안이 나갈 때 왕세자의 병세는 이미 보고드렸습니다. 그후 겨드랑이 밑의 응어리와 산기가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증세는 침과 뜸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조섭을 잘못하여 설사병이 나서 억지로 탕약10첩을 드시게 했습니다. 지금은 여러 증세가 모두 나았습니다만 한 달 동안이나 아픈 나머지 원기가 쉽게 회복되지 않아서, 수라도 보통 때와 같지 않아 이 때문에 걱정입니다.
황제께서는 지금 여염집에 피해 계셔서 세자의 병환이 위중함을 아직도 믿지 못한다고, 와서 말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12일 저녁때 용골대와 가리박사가 한의 한명을 데리고 갑자기 문밖에 와서 말하기를,
“황제께서 우리들에게 세자의 병세를 가서 보라고 하셨다”고 하며 여러 재신들은 알지 못하게 하고 곧바로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였습니다. 정명수가 사정을 아뢰어 조금 멈추게 하고는 달려와서 말하기에 신들이 황급히 나가서 맞이하였습니다. 용장군 등이 세자께서 누워 계신 안채에 들어와 가까이 앉아 진찰하고 갔습니다. 그 기색을살펴보니, 불의에 들어와서 그 허싱를 알고자 한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세자의 병세를 이같이 믿지 못하니, 여기의 일이 매우 걱정입니다.
5월 24일 이달 18일 선전관 이경빈이 돌아갈 때 왕세자의 병세가 회복되신 일은 이미 보고드렸습니다. 그후 모두 회복되셨으나, 겨드랑이 밑에 응어리진 증세는 비록 이미 사라졌다고 해도 때때로 잡아당깁니다. 대단하지는 않습니다만풍토가 좋지 않아서 몸조리가 쉽지 않으니 이것이 걱정됩니다.
5월 27일 24일 무낭청 성익이 나갈 때 왕세자께서 병세를 회복하신 사정은 이미 보고드렸습니다. 그후 세자께서 한결 회복되셨습니다.
6월 21일 전 군수 유후성이 들어온 후 세자께서 크게 나쁜 증세는 달리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제 오른쪽 겨드랑이 밑에 응어리진 곳이 약간 당기는 증세가 있어서 침을 한번 맞으셨습니다. 후에 가을의 쌀쌀한 기운을 기다렸다가 쑥뜸 들이는 일을 의논하여 결정하겠습니다. 올리는 환약도 의관들과 상의하여 가감하겠습니다. 유후성을 내보냅니다.
8월 8일 왕세자 내외분께서는 안녕하시며 대군께서도 평안하십니다.
(황세자의 서행에 왕세자를 요구했었음)
왕세자는 이제 막 큰 병을 치렀는데 추위를 무릅쓰고 행차를 한다면 결국 하루도 견디지 못할 것인데 형편이 구박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간의 망극한 상황은 형언하기 어렵습니다.
10월 15일 왕세자 내외분은 안녕하십니다. (중략)
황제께서 출정하는 시기는 소문을 듣지 못하다가, 갑자기 나가기를 정했을 뿐 아니라 세자께서 홀로 가시는 것도 뜻밖이어서 저희는 가슴이 모두 내려앉아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대군께서 저를 불러 상의하시기를,
“세자께서 평소에 산증을 앓고 계셔서 형편이 추위를 무릅쓰고 가기는 어렵소. 내가 대신 가기를 청하고자 하니 즉시 정명수를 불러들여 직접 말하시오.” 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물러나와서 정명수로 하여금 용, 마에게 비밀히 연락하게 하여 말하기를,
“세자께서 평소에 산증이 있는 것은 비단 두 장군만 아시는 것이 아니라 황제께서도 잘 아시는 바입니다. 지난 여름 몹시 더울 때 이 병을 앓으시어 극히 위중하셨습니다. 하물며 이 추운 계절에 찬 땅에서 자면 틀림없이 병이 나실 겁니다. 만약 도중에 이 병이 나시면 따라가지고 못하고 물러나오기도 또한 어렵습니다. 어찌 단지 배종 신하들만 망극하겠습니까? 황제께서도 몹시 걱정하실 것입니다. 또한 깊은 궁궐에서 나서 자라시어 말을 달리는 것도 익숙지 못합니다. 며칠 전 강 밖으로 잠시 산행을 갔을 때도 말을 달리지 못하고 거의 말에서 떨어진 때가 많았던 것은 황제께서도 친히 보신 바입니다. 몸에는 중병이 있고, 말을 타기도 어려우니 군병들 사이에서 따라가기가 어렶습니다. 또한 대군께서 대신 가기를 청하니 그 사정을 알 만할 것입니다. 우리 국황처럼 사랑하시기는 다름이 없으실 것이니, 자원하여 청하는 것을 황제께서는 반드시 들어주실 것입니다. 이 뜻을 두 장군이 반드시 아뢰어서 잘 처리해주십시오.” 했습니다. (중략)
마장군이 말하기를 “어제 저녁에 이미 아뢰었습니다. 세자는 여기 머물고 대군이 수행하기로 황제께서 결정하셨습니다.(생략)”
세자께서 천만다행으로 수행을 면할 수 있어서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대군께서 이번 행차를 당하였는데 길이 얼마나 먼지, 가는 길이 험한지, 날짜가 언제인지 알 수가 없어 그간의 걱정은 또한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11월 17일 세자께서 이번에 망극한 행차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산증이 있다고 말했기 때문인데 이후에도 어려운 일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날씨가 지독하게 추워서 전의 증세가 재발하여, 아문에 알리니 용장군 무리가 깊이 걱정하였습니다. 제가 또 말하기를,
“세자의 병환이 이와 같은데 이곳에서는 약물이 다 떨어져서 약을 지어올릴 수 없으니 극히 애가타고 걱정입니다. 사람을 평안도에 보내어 약재를 찾아가지고 와서 급히 구완을 해야겠습니다.”라고 하였더니 나가도록 하였습니다.
인조 17년(1639)
2월 8일 왕세자 내외분은 안녕하시오며, 대군께서도 평안하십니다.
황제의 서행 시기는 오는 9일로 정해졌는데, 지난달 그믐에서야 비로소 여러 장수들에게 출동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날 저녁 후에 정명수가 와서 말하기를, 황제께서 이번 행차할 때 세자도 수행할 것을 이미 분부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행의 따르는 신하 이하 관원들의 일꾼, 타고 가는 말과 짐 실을 말의 수효를 써서 내라고 하였습니다. 저희가 모여서 놀라고 황당하여 어떻게 할 바를 몰랐습니다. 지난해에는 석 달을 앞두고서 행장을 준비하였는데도 모든 일이 또한 많이 미비했습니다. 지금은 일이 급히 나와서 모든 준비가 정리될 리 만무한 형편입니다. (중략)아문에 나아가 하소연을 하려는 즈음에 정명수가 와서 말하기를, 용장군이 비밀히 그에게 이르기를
“세자가 말을 탈 수 없고 또한 산증이 있는 것은 황제께서도 아시는 바이다. 그 아우가 형을 위하여 대신할 뜻이 없겠는가? 재신들에게 말하여 회답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합니다.(이후 봉림대군이 흔쾌히 대신 가겠다고 한 이야기)
3월 20일 왕세자 내외분은 안녕하십니다. 세자께서 전에 산증을 앓았으므로 재발할까 두렵습니다. 그 뿌리를 미리 다스리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의관 유달 등과 상의하여 이달 17일부터 쑥뜸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뜸질한 혈과 뜸질한 회수는 약방에서 보낸 서신 가운데에 모두 상세히 있습니다.
4월 2일 왕세자 내외분은 안녕하십니다. 세자께서는 지난달 17일부터 뜸을 들여 26일에 마쳤습니다. 뜸들인 혈의 수효화 횟수는 약방에서 올린 서계에 상세히 들어 있습니다.
6월 15일 왕세자께서는 며칠 전에 더위로 인한 이질 기운이 잠깐 있으셨으나 약을
2첩 드시고 곧 회복되셨습니다.
인조 18년(1640)
9월 16일 왕세자께서는 요즘 밤이면 신열이 많이 나고 목과 혀가 타는 듯이 말라 차를 마셔 목을 축인 뒤에야 조금 풀리고, 또 오른쪽 팔다리가 때때로 저리면서 뻣뻣해지고, 정강이가 늘 쑤시고 편찮으셔서 의관 박군, 정훤 등이 상의하여, 약은 금방 가입퇴열탕을 지어올렸으며, 쑤시고 아픈 증세에는 침과 뜸을 놓을 생각입니다.
9월 24일 왕세자께서 편찮으신 증세에 대해서는 이달 16일 이미 보고드렸습니다. 가입퇴열탕 8첩을 잇달아 올렸으나 아직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른쪽의
마비증세도 그대로입니다. 우선 10여첩을 계속 써보고 다시 다른 약을 의논할 생각입니다.
10월 5일 왕세자의 증세는 가입퇴열탕 10첩을 잇달아 드셔도 효과를 보지 못해 다시 가입사물탕 7첩을 지어올렸습니다. 목이 마르고 신열이 나는 증세는 조금 없어졌으나 겨울철에 찬 약재가 비위를 상할 것 같아 잠시 멈추었습니다.
11월 10일 왕세자의 증세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으며, 빈궁께서는 가미온담탕 20첩을 드신 뒤에 증세가 전보다는 덜하나 아직 완전히 쾌차하지 않았으므로 가미영신환을 이제 막 지어올렸으며, 대군께서는 평안하십니다.
인조 19년(1641)
2월 9일 왕세자께서는 전에 앓으시던 마비증세로 24일부터 침을 맞기 시작했는데 침을 다섯 번 맞은 뒤에 뜸을 들이려고 합니다.
2월 18일 왕세자께서는 침을 맞으신 뒤로 증세가 더하거나 덜한 것이 별로 없고, 빈궁께서는 안녕하시며 대군께서도 평안하십니다.
3월 8일 왕세자께서는 침을 맞으신 뒤에 이제 뜸을 뜨려고 하며, 빈궁께서 앓는 곳에 약을 쓴 연유 및 대군의 발에 생긴 습창이 더하고 덜한 것은 의관이 드린 보고 중에 자세히 있습니다.
3월 15일 왕세자께서는 침을 맞고 뜸을 뜬 뒤에 안녕하시며, 빈궁께서 침을 맞고 약을 드신 사연 및 대군께서 침을 맞으신 사연은 의관의 보고 중에 상세히 있습니다.
3월 23일 왕세자께서는 침을 맞고 뜸을 뜬 뒤에 안녕하시며, 빈궁께서 침을 맞고 약을 드신 사연 및 대군께서 침을 맞고 뜸을 뜬 일은 의관의 보고 중에 상세히 있습니다.
4월 2일 왕세자께서는 침을 맞고 뜸을 뜬 뒤에 안녕하시며, 빈궁께서도 침을 맞고 뜸을 뜬 뒤에 여러 증세가 완전히 나으시고 대군께서도 안녕하십니다.
4월 8일 오늘 오전 10시쯤에 왕세자께서 침을 맞으셨는데, 증상은 의관이 올린 보고 중에 자세하게 (적혀) 있습니다.
4월 11일 왕세자께서 근래 어깨와 등이 결리고 뻐근하신 통증 때문에 지난 8일에 침을 맞으려고 하셨는데 침을 맞으실 때가 되자 날씨가 매우 나빠져서 잠시 미루셨습니다. 그후 그 증상이 점차 가라앉으시더니 이제는 평안해지셨습니다.
11월 19일 왕세자와 빈궁께서는 안녕하시며 대군 또한 평안하십니다. 세자께서 이달 16일 오른쪽 눈에 백태가 끼시더니 갑자기 붉어지며 통증이 있으셨습니다. 의관 정지문 등과 함께 약을 의논하여 드시게 하였더니 어제부터 다행히 조금 가라앉으셨는데, (이는) 의관들의 보고서에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11월 20일 왕세자와 빈궁께서는 안녕하시며, 세자의 눈병은 이미 다 나아 회복되셨으니 매우 기쁘고 다행한 일입니다.
12월 2일 왕세자와 빈궁께서는 안녕하시며, 왕세자의 오른쪽 눈병의 증상이 조금 나아진 일은 지난달 22일 아침 익찬 최정현 등이 가지고 간 장계 가운데에서 이미 보고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왼쪽 눈이 또 통증이 나셔서 부득이하여 두 번 침을 맞으셨는데 다행히 즉시 차도가 있었습니다.
12월 3일 왕세자와 빈궁께서는 안녕하시며 대군 또한 평안하십니다. 세자의 안질이 침을 맞으신 후에 다행히도 즉시 차도가 있은 일과 대군의 안질 또한 이미 회복된 내용은 어제 큰 물고기를 내보낼 때의 장계 중에서 이미 아뢰었으며, 의관들의 보고서에도 있으니 다시 번거롭게 아뢰지 않습니다.
인조 20년(1642)
3월 19일 왕세자께서는 이달 초순 이후로 몸이 불편하셔서 비록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지극히 걱정스럽고 민망한데, 의관이 올린 글 중에 자세히 아뢰었습니다.
3월 25일 왕세자께서는 이제 차도를 보이시므로 기쁘고 다행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사오며, 빈궁께서는 안녕하시고 대군께서도 평안하십니다.
10월 4일 전달 30일에 정역관이 와서 황제의 명을 전해 말하기를 “내달 5일에 세자께서 봉화성에 가셔야 한다”고 했으나, 무슨 일 때문에 나가는지는 말하지 않았으므로 신들이 놀랍고 황공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용장이 아문에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먼저 (세자를) 보내는 이유를 묻고, 다음에 세자께서 평소에 산증이 계셔서 때없이 발작을 일으키시는데, 이 엄동설한에 멀리 나가시게 되면 그 걱정되는 마음을 아뢰려고 했습니다만, 사흘째 아문에 나오지 않아서 말씀드릴 방도가 없으니 그저 걱정되고 답답할 따름입니다.
인조 21년(1643)
12월 14일 왕세자께서 며칠 동안 감기 기운이 조금 있으시니, 채득기, 박군이 들어와 진찰한 후 먼저 삼소음 2첩을 지어올리고 계속하여 인삼강활산 2첩을 올린 후, 자못 몸이 좋아져서 여러 증상이 줄어들고 그쳐사옵고, 빈궁께서는 건강이 전과 마찬가지이시며, 봉림대군, 인평대군 또한 평안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