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세자의 독살설에 대한 의학적 고찰
Medical Investigation into the Alleged Poisoning of Crown Prince Sohyeon: Who Killed Crown Prince Sohyeon?
Article information
Trans Abstract
Crown Prince Sohyeon (1612-1645) was the eldest son of King Injo, the 16th monarch of the Joseon Dynasty. Following the defeat in the Manchu Invasion of Korea (1636-1637), he was taken as a hostage to Qing China along with his younger brother, Prince Bongrim (later King Hyojong), and returned to Joseon after eight years in 1645. He died in the same year without ascending to the throne. Allegations of his poisoning emerged based on entries in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leading to widespread acceptance of the poisoning theory and the creation of various cultural works. Although scholars of traditional Korean medicine have published papers suggesting a disease-related death, no thorough medical analysis has been conducted. This study aims to review historical documents to analyze the medical history of Crown Prince Sohyeon and ascertain his cause of death. The study found that Prince Sohyeon began experiencing respiratory, digestive, and urinary symptoms during his time as a hostage in Qing China. The symptoms included fever, cough, dyspnea, thick saliva, thirst, loss of taste, postprandial fatigue, abdominal pain, and dizziness, which persisted even after he returned to Joseon. He eventually succumbed to what appears to have been a respiratory illness characterized by persistent fever and dyspnea. Based on the documented symptoms, it is hypothesized that the cause of death was sepsis. However, given the chronic nature of the symptoms, an underlying autoimmune or metabolic disorder is also suspected as the primary cause, although this cannot be confirmed from the available historical records.
서 론
이왕(李滉) 즉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는 조선 중기의 왕세자로, 제16대 왕인 인조의 첫째 아들이다. 그는 병자호란(1636-1637)의 패전 이후 1637년 청나라에 동생인 봉림대군(후일 효종)과 함께 인질로 보내졌다. 이는 당시 병자호란 패전의 항복 조건으로 조선의 왕세자와 다른 왕족들을 청나라에 인질로 보내는 것이 요구에 따른 조치였다. 소현세자는 1625년 조선에서 그리고 인질로 잡혀 있던 1639년 청에 의해 세 차례나 세자에 책봉되는 이전에 없는 굴곡을 겪으면서 청나라의 생활을 보내다가 1645년 조선으로 8년만에 돌아오게 되지만 끝내 왕위에 오르지 못한 채 돌아온 해인 1645년 사망하였다[1-3].
이러한 비극적 운명의 소현세자에 대한 관심은 1964년 Kim의 연구[4]를 통해 최초로 크게 조명되었다. 이 논문에서는 당시 소현세자가 아담 샬 폰 벨(Adam Schall von Bell)과의 교유를 통해 서양과학에 대한 수준 높은 이해를 가졌으며 당시 청의 유력자와 교유하여 국왕대리 수준의 지휘를 획득한 것으로 보았으며 특히 소현세자가 서구과학과 천주교에 대해서 비상한 호의와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왕에 즉위하였다면 조선의 자주적 근대화가 가능했다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성향으로 인조와 명분론과 현실주의적 갈등이 발생하였고 소현세자가 타인에 의해 사망했다는 독살설을 제기하였다. 더욱이 세자의 죽음 이후 세자빈 강씨가 인조 독살 미수의 역모사건으로 사사까지 받은 상황과 소현세자의 세 아들이 제주 유배를 가면서 곧이어 의문스러운 죽음이 발생한 사실을 근거로 이후 소현 세자의 독살이 기정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역사학적 해석을 통한 소현세자 독살설이 대중에게 전파된 후 그에 대해 대중의 호의적 평가가 지속되면서 독살을 기반으로 하는 현대 창작물이 꾸준히 만들어지면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후 한의학을 기반으로 하는 소현세자 사인 분석의 논문[5,6]과 소현세자의 독살설에 대한 역사학계의 반론[7-10]이 제시되었으나 현대 의학의 관점에서의 소현세자의 사망원인과 사망의 종류에 대한 해석은 이루어진 바 없다. 본 연구의 목적은 소현세자의 병적 증상과 죽음에 대해 기술된 역사학적 문헌을 조사하여 현대 의학적 해석을 통해 소현세자가 실제 앓고 있었던 질병의 종류를 추정하며 특히 사망원인을 판단하는 법의학의 관점에서 분석하여 의학적 사망원인과 사망의 종류를 추정하려고 한다.
재료 및 방법
소현세자의 사망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본 논문에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심양일기, 소현을유동궁일기 및 심양장계에서 병적 증상과 징후 및 사망과 관련된 사항을 추출하여 연구에 활용하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조선(1392-1897)의 조정에서 역대 왕인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간의 왕들의 재위 기간을 단위로 편찬한 공적인 연대기이다. 실록에서는 연월일 순으로 주요 정무 기록들이 정리되어 있으며 조회 때의 대화, 논의 내용, 상소문 및 사관(史官)의 논평이나 비평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우리말로 번역되어 온라인 인터넷 접근(https://sillok.history.go.kr/main/main.do)이 가능하며 소현세자 병세의 증상이 나타나는 시점부터 사망까지 분석하였다.
승정원일기는 조선 시대의 중앙 행정 기구인 승정원에서 작성한 일기 형식의 공식 기록물로 왕의 명령을 집행하고 보고하는 기구로서, 왕과 신하들 간의 대화, 명령, 보고 등의 확인되며 현재까지 약 3,243책이 남아 있어 조선 시대의 여러 기록 중 가장 방대한 양이며 인조의 재위 기간의 내용은 모두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으며 국사편찬위원회 승정원일기 데이터베이스(https://sjw.history.go.kr/main.do)나 한국고전번역원의 데이터베이스(https://db.itkc.or.kr)로 접근이 가능하였고 소현세자의 병세와 사망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하였다.
심양일기는 조선의 소현세자가 청나라 심양(현재의 중국 선양)에서 인질로 머물렀던 기간 동안의 경험을 기록한 일기체 서적이며 소현을유동궁일기는 심양일기에서 이어지는 내용으로 1645년(인조 23년) 2월 17일부터 같은 해 6월 12일까지 약 5개월의 일기가 확인된다. 본 연구에서는 번역본인 민속원 출판사의 ‘역주 소현심양일기, 소현을유동궁일기’을 이용하여 서적의 내용 중 소현세자의 병적 증상과 징후를 추출하여 분석하였다.
심양장계(瀋陽狀啓)는 조선 인조 시대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 심양에서 볼모 생활을 하던 동안 조선 조정에 보내는 보고서로 당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서 겪은 일들, 건강 상태, 정치적 상황 등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그들의 생활과 정치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사용되어 왔다. 본 연구에서는 아카넷 출판사에서 번역된 ‘심양장계: 1637-1643년 심양에서의 긴급 보고’의 서적을 이용하여 소현세자의 병적 증상과 징후를 추출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조선 소현세자의 사망원인에 대해 이 다섯 가지의 역사 기록물 및 이에 대한 해석 연구를 수행하여 현대 의학적 병인론에 근거하여 사망원인과 사망의 종류를 추정하고 고찰하였다.
결 과
조선왕조실록에 기재된 소현세자의 질병과 관련된 기록을 살피면 소현세자는 인조 23년인 1649년 4월 26일에 사망하였다(Appendix 1). 당시 실록에는 시신의 양태에 대한 기술은 없이
세자가 10년 동안 타국에 있으면서 온갖 고생을 두루 맛보고 본국에 돌아온 지 겨우 수개월 만에 병이 들었는데, 의관(醫官)들 또한 함부로 침을 놓고 약을 쓰다가 끝내 죽기에 이르렀으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슬프게 여겼다.
로 기재하고 있으며 다음날인 4월 27일에는 염습(斂襲)을 마치고 사망한 후 처음으로 거행되는 제사 의식인 습전(襲奠) 상례(喪禮)가 시행된 기록이 확인된다[11]. 승정원일기에서도,
왕세자가 훙서하였다: 오시(午時)쯤에 왕세자가 훙서(薨逝)하였다. 약방의 문안에 대해, 망극한 참변을 당하였다는 비답: 약방이 문안하니, 답하기를, “뜻밖에 이런 망극한 참변을 당하였다.” 하였다. - 《약방일기》에 의거함 -
이라는 사망 사실만이 기록되어 있다[12]. 다만 사망 약 2달이 지난 인조 23년(1649년) 6월 27일에 시행된 장례 후 일정 기간이 지나서 고인을 기리며 올리는 제사인 졸곡제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13].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幎目)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 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藥物)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외인(外人)들은 아는 자가 없었고, 상도 알지 못하였다. 당시 종실 진원군(珍原君) 이세완(李世完)의 아내는 곧 인열 왕후(仁烈王后)의 서제(庶弟)였기 때문에, 세완이 내척(內戚)으로서 세자의 염습(斂襲)에 참여했다가 그 이상한 것을 보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한 것이다.
이러한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을 근거로 1964년 Kim의 연구[4]에서는
세자는 귀국 두 달 만에, 병증이 있은 지 3일 만에 34세의 장년으로 급서 하였던 것이다. 시체는 전신이 완전히 검게 변해 있었으며 일곱 구멍에서 출혈하고 있어 독살된 혐의가 짙은데, 그 후의 인조의 태도는 세자가 독살되었으며 그 장본이 인조라는 심증을 굳게 하는 것이었다. (중략) 결국 소현세자와 강빈의 비극은 현실과 명분의 갈등의 소산이며 숭명 반청을 기치로 하는 인조 정권의 제물이었으며 호란과 더불어 반정의 결과였던 것이다.
로 해석하였고 이는 이후의 독살설 주장의 강력히 근거가 되었다.
1. 소현세자는 독살되었는가?
소현세자 독살설과 관련하여 의학적인 쟁점 사항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소현세자의 시신에서 나타난 소견을 바탕으로 사망 원인을 독살로 판단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실록에서는 앞서 언급하였듯이,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幎目)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 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藥物)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로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쟁점은 사망 후 관찰된 소현세자의 시신의 변화가 실제로 당시 조선 중기에 사용된 독물로 인한 것인지 여부이다. 조선 중기 사용될 수 있는 독극물을 살피면 대표적으로 죄를 지은 사람에게 임금이 직접 하사하는 독약인 사약(賜藥)을 들 수 있는데 사약의 적확한 성분은 문헌이 남아 있지 않으며 연구 결과도 발표된 바 없어 현재로서 그 실체를 알 수는 없다. 다만 사용된 그 성분으로 비소, 수은의 가능성과 함께 부자(附子), 초오 및 협죽도의 독성 성분으로 알려진 천연 알칼로이드인 아코니틴(aconitine) 등을 대표적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독살의 성분이 명확히 기재된 것으로 총 3건으로 모두 비상(砒霜)으로 확인된다[14–16]. 이 비상은 비석(砒石)을 불에 태워서 얻는 백색 분말체로 주 성분은 삼산화 비소(As2O3)이다. 이러한 비소 중독일 경우 복부 통증과 구역 및 구토 또는 설사가 동반되며 사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사망자에 대한 부검 사례에서 시신의 외부 소견에서도 일반 사망자와 차이가 없으며 고농도의 비소 투여에도 코와 입 및 귀 등에서 출혈성 경향이 관찰되지 않았다[17,18]. 신체 내부의 부검 소견에서도 각 장기의 울혈이 보였으며 다만 폐에서 출혈성 부종이 관찰될 수 있으나 기도나 식도 내에 출혈이 발생하는 소견은 보이지 않았다. 실제 비소의 만성적인 중독에서도 피부의 과다각화증(hyperkeratosis)이나 국소적인 과다색소침착(hyperpigmentation)이 확인되며 피부의 검은색의 전반적인 변색은 비소 중독 사망자나 중독에 의한 생존자에서도 보고된 바 없으며 쥐와 생쥐를 이용한 비소 중독 실험에서도 비소 중독에 의한 피부의 변화는 관찰된 바 없다[19].
수은 중독의 경우에도 대개 심각한 복통과 구토 및 구역 또는 설사 등이 동반되며 사망할 수 있는데 이러한 경우에도 비소 중독 사망자와 같이 신체 외표면에서는 일반 사망자와 같으며 피부의 변색 등은 역시 보고된 바 없다[20–22].
한편 부자, 초오 및 협죽도의 독성 성분으로 알려진 아코니틴은 전압 의존성 나트륨 채널을 지속적으로 활성화로 인한 심장과 신경계 독성으로 인한 사망을 유발하는데 피부의 변화를 일으킬 기전이 없으며[23], 실제 본 연구진이 수행한 아코니틴 중독으로 사망한 이틀 후 발견된 48세 남성의 시신의 사후 검사에서도 피부의 변색은 전혀 관찰되지 않았다(Fig. 1). 아코니틴 사망자 국제 보고에서도 피부의 변색 등의 소견은 보고된 바 없다[24,25].
전통적으로 중독에 의한 사망자의 피부가 검게 변한다는 믿음이 있었는데, 이는 사망과정에서 질식 기전이 동반되는 청색증을 중독으로 인한 피부 반응으로 여길 가능성이 있으며 또는 비상의 주 성분은 삼산화 비소나 불순물 형태로 섞인 황(S)이 비상독을 검출하기 위해 쓰였던 은수저의 성분인 은(Ag)과 반응할 때 생성되는 황화은(Ag2 S)의 검정색 특성을 보고 비상 중독으로 인한 사망자의 피부 역시 검게 변색한다고 오해하여 생각한 결과일 수도 있다.
결국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소현세자의 사망에 시신의 상태만으로 독물로 인한 중독을 추정하였으나 당시 사용된 독극물로는 시신의 변색을 유발할 수 있다고 볼 수 없다.
한편 조선왕조실록의에서 기재된 소현세자의 시신의 상태를 현대 법의학적 관점에서 다시 살펴보면, 전신이 검은 빛으로 보이는 피부 변색과 코와 입 및 귀 등에서 혈성액(bloody discharge) 소견이 보이는데 이를 부패(decomposition)로 인한 사후 변화의 가능성을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소현세자는 인조 23년인 1649년 4월 26일에 사망하였고 이는 현재의 양력으로 보면 5월 21일에 해당하며 다음날인 양력 기준으로 5월 22일에 입관(入棺) 전 죽은 자의 시신을 닦고 수의를 입히는 장례 절차인 염습 과정에서 시신의 변화가 가능한지를 확인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부패(decomposition)는 사망 후 발생하는 인체의 구조와 구성의 변화로 다양하고 복잡한 생화학적 및 병리학적 과정에 의해 진행되는데 미생물, 특히 부패균이 인체의 복잡한 유기물을 분해하여 단순한 유기화합물로 바꾸는 것을 부패(putrefaction)라 한다[26,27].
일반적으로 부패(putrefaction)는 늦은 사후변화로 알려져 있으며 미생물의 효소-화학적인 변화가 그 주된 기전으로 알려져 있으며 세균(Escherichi coli, Enterococci, Clostridium perfringens 등)과 외부에서 들어온 세균(Bacillus subtilis 등)이 부패균으로 유발된다[26,28].
부패균은 사망 후 사망자의 혈관 안에 있는 혈액을 따라 번식하며 부패균이 스스로 만든 가스 압력으로 번져 나가는데 산소가 적고 수분이 많은 상황에서는 환원작용으로 단백질이나 탄수화물을 분해하여 각종 아미노산, 암모니아 가스, 황화수소(H2 S)가 생기면서 피부의 변색이 발생한다. 일반적으로는 사망한 지 하루나 이틀이 지나면, 주검의 하복부가 어두운 녹색(暗綠色)을 띄게 되며 이 변색은 차차 상복부나 흉부로 번지는데(부패성 변색), 유황을 가진 단백질을 분해하여 발생한 황화수소가 헤모글로빈에 작용하여 황화헤모글로빈(sulfhemoglobin)이나 황화메트헤모글로빈(sulfhmethemoglobin)을 만들기 때문이다[29,30]. 또한 부패에서는 부패균에 의한 작용으로 인한 부패 가스 압력이 높아지면서 파열된 점막 혈관 소견과 함께 부패로 인해 혈액이 용혈하면서 혈색소가 혈관 밖으로 번지면서 코와 입 및 귀 등에서 출혈로 오인할 수 있는 부패 혈성액이 보이는 것은 부검을 담당하는 의사에게는 흔히 경험하는 소견이다.
결국 염습이 사망 다음날에 이루어진 경과를 보면 부패가 하루 만에 발생했는지가 쟁점이 되는데 부패를 촉진하는 조건으로 높은 기온의 노출, 높은 습도, 수포성 피부 병변, 과도한 침구의 덮임의 외부적 요인과 함께 당뇨나 패혈증과 같이 신체 고온에서 사망할 수 있는 질병과 비만 등이 알려져 있으며[26], 실제 미생물이 혈액이나 장기에 이미 존재하는 경우 및 고온의 상태에서는 급속하게 부패가 가속화되는 기전이 알려져 있다[31]. 또한 당뇨 환자에서의 고혈당증 상태에서는 박테리아의 부패 과정에서 발효를 위한 당의 공급이 충분해지면서 부패가 가속화되는 것이 보고되었다[26].
따라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소현세자의 실제 앓고 있던 질병에 의해 부패가 가속화되면서 시신의 변화가 발생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이를 추단하기 위해 소현세자의 질병력과 사망원인의 현대 의학 관점의 추정이 요구된다.
2. 소현세자는 귀국한 후 병증이 확인된 3일 만에 사망하였는가?
소현세자의 독살설에 기반한 논란 중 두 번째 쟁점은 실제 귀국하여 병증이 확인된 후 사흘 만에 사망하였는지 여부이다.
이에 대해 조선왕조실록 인조 15년 1637년 2월 8일 소현세자가 볼모로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갈 당시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서술이 확인된다[32].
무인년(戊寅년, 1638년)에 구왕(九王, 도르곤)이 철병하여 돌아가며, 왕세자와 빈궁(왕세자의 부인), 봉림대군과 그의 부인이 서쪽으로 향했다. 상(왕)은 창릉 서쪽에서 이들을 보내기 위해 행차했다. 길가에 말을 멈추고, 구왕과 서로 인사했다.
구왕이 말하길, “멀리서 와서 배웅해 주시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상(왕)이 말하길, “가르치지 못한 아이들이 지금 따라가려 하니, 대왕께서 가르침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구왕이 말하길, “세자의 나이가 이미 저보다 많은데, 그가 일을 처리하는 것을 보니, 제가 감히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황제가 후하게 대우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상(인조)이 말하길, “여러 아들이 깊은 궁궐에서 자랐는데, 이제 여러 날 동안 노숙을 하여 병이 이미 생겼습니다. 길에서 자지 않도록 방에서 잘 수 있게 해주기를 바랍니다.”
구왕이 말하길, “삼가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만리 길의 이별에 마음을 쓰게 되어, 국왕께서 상심하실까 두렵습니다. 세자가 비록 가지만, 곧 돌아올 것이니, 지나치게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군사들이 매우 바쁘니, 이제 물러가겠습니다.”
세자와 대군이 절을 올리고 떠나며, 상(왕)은 눈물을 흘리며 배웅하며 말하길, “힘내라! 화를 내지 말고, 경솔히 행동하지 말라.”
세자는 엎드려 가르침을 받고, 신하들은 옷자락을 붙잡고 통곡했다. 세자가 이를 말리며 말하길, “주상께서 여기 계시니, 어찌 감히 이럴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나서, “각자 몸을 아끼십시오.”라고 말한 후, 말에 올라 떠났다.
이를 통해 소현세자가 이미 전쟁 중에 피란 생활 당시 노숙으로 인해 병이 생겼다는 기술이 확인된다. 이후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소현세자가 귀국한 이후인 인조 23년인 1645년 4월 23일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었다[33].
어의 박군이 세자를 학질이라고 진찰하다. 세자가 병이 났는데, 어의 박군(朴頵)이 들어가 진맥을 해보고는 학질로 진찰하였다. 약방이 다음날 새벽에 이형익(李馨益)에게 명하여 침을 놓아서 학질의 열을 내리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후 4월 24일과 4월 25일에 동일한 내용의 “세자가 침을 맞다.”가 기재된 후 4월 26일 소현세자의 사망이 기록되었다[34,35].
따라서 조선왕조 실록에 따르면 1964년 김용덕의 논문의 주장대로 학질이라는 진단 3일 후에 사망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학질은 한의학에서 해학(痎瘧)이라고도 하는데, 현대에서는 모기에 의해 전염되는 말라리아를 학질로 추정하고 있으나 실제 조선시대 기록에서는 반복적으로 열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증상이 나타나는 다양한 질병을 학질이라고 기술하였으며 실제 한의학에서도 조선시대의 학질을 말라리아로 국한하지 않는다[5].
그러나 승정원일기를 살피면(Appendix 2),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간 지 1년 후인 인조16년인 1638년 경부터 소현세자의 신체 질병 중 소화기 또는 비뇨기 질환으로 추정되는 산증(疝症)에 대한 기록이 지속적으로 발견되며 특히 1638년 5월 4일에는 산증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확인된다[36].
삼가 박로(朴?) 등의 장계를 보니, 세자의 증후가 가볍지 않은 듯하여 너무도 애가 타고 답답합니다. 유후성(柳後聖)을 장계에서 말한 대로 급히 떠나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그저께 이미 유후성, 정지문(鄭之問) 등이 의약(議藥)하였는데, 증후가 이미 바뀌었으므로 지금은 괴(塊)를 다스리고 음식을 잘 먹게 하는 탕제를 써야 합니다. 이에 상당하는 약재를 먼저 파발로 내려 보내서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하여금 따로 군관을 정해 주야로 달려가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감히 아룁니다.
이 기재에 따르면 이미 소현세자는 배종의관(陪從醫官)으로부터 치료를 받은 기록이 있으며 이후에도 인조 18년(1640년), 인조 22년(1644년)에 지속적으로 소현세자의 발열과 설사 등의 증상과 치료에 대한 기록이 승정원일기에서 확인된다(Appendix 2). 특히 영구 귀국하여 한양에 도착한 당일인 인조 23년(1645년) 2월 20일의 기록은 다음과 같이 확인된다[37].
의약할 수 있도록 세자 병증의 기록을 내려 줄 세자를 간병한 결과를 보고하는 약방 도제조 영의정 김류 등의 계
세 번째 아뢰기를,
“전교하셨습니다. 의관들로 하여금 세자의 증후를 알아보게 하였더니, ‘전에 앓던 여러 증세들은 거의 회복되었으나 기침이 나고 숨이 차고 침이 탁하고 번갈이 나고 음식 맛을 모르는 증세는 여전히 다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외감(外感)은 비록 풀렸으나 위(胃)의 열이 아직 남아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모영수탕(二母寧嗽湯)에 지골피(地骨皮)와 맥문동(麥門冬)을 각 1돈씩 가미하여 5첩을 연달아 복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대로 지어 올리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 《약방일기》에 의거함 –
이 기록을 살피면 소현세자는 지속적으로 기침과 호흡곤란 및 침이 탁한 호흡기 증상과 갈증이 심해 다량의 물이 마시고 싶은 목마름 증상인 다갈증(polydipsia)의 용어인 번갈(煩渴) 등이 기재되었다.
영구 귀국 사흘 후인 인조 23년(1645년) 2월 24일의 기록에서도 기침, 호흡곤란, 어지럼증, 목마름 등이 기록되었다[38].
종합하면 소현세자는 영구 귀국 이후에 기침, 호흡곤란, 어지럼증에 동반된 목마름증(hydrodipsomania) 및 메스꺼움(nausea) 등의 증상이 확인되었고 이에 당시 폐렴으로 해석되는 전통적인 용어인 폐열(肺熱)로 인한 기침과 가래, 열감 등의 증상을 치료하기 위해 사용된 이모영수탕(二母寧嗽湯)이 처방되었다. 이후에도 발열, 열감, 기도 감염 등에 처방된 한약인 시호연교탕(柴胡連翹湯) 등이 처방되었으나 계속적으로 기침 등의 호흡기 증상과 발열과 오한이 호전과 악화가 반복되었고 식후의 혼곤증(昏困症)이 지속되어 이를 학질로 진단하여 치료하였으나 인조 23년(1645년) 4월 26일 소현세자는 사망하였다. 결국 승정원 일기에 따르면, 소현세자는 귀국 전부터 비뇨기 또는 소화기 및 호흡기 질환으로 추정되는 증상으로 치료받은 기록이 다수 확인된다. 이 외에도 심양일기(Appendix 3), 소현을유동궁일기(Appendix 4) 및 심양장계(Appendix 5)를 살펴봐도 귀국 전부터 비뇨기 또는 소화기 및 호흡기 질환으로 추정되는 증상의 병력이 확인된다. 결국 소현세자가 영구 귀국한 인조 23년(1645년) 2월 20일 이후에도 이와 같은 기존의 질병 증상이 지속되면서 호전과 악화를 반복하였고 이에 대한 치료를 받다가 사망한 사실을 본다면 소현세자가 귀국한 후 병증이 확인된 사흘 만에 사망하였다고 볼 수는 없으며 기왕증의 상태가 지속되다가 사망하였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3. 현대의학 관점에서 소현세자의 질환과 사망원인은 무엇으로 추정할 수 있는가?
Table 1에서 제시한 문헌(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심양일기, 소현을유동궁일기 및 심양장계)에 따른 소현세자의 주요 일정과 신체 증상과 치료력에 대한 연대표를 살피면, 소현세자는 인조 15년 1637년 피란 생활에서 노숙으로 병이 들어있다는 기재 이후 1637년 심양에 도착 후 평소에 건강이 좋지 않았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이후 1637년 5월 15일 곽란(霍亂: 더위를 먹거나 그 밖의 일로 심하게 토사하는 급성 위장염)이 발생하였고 이후 1638년 4월 18일경 산증(疝症)으로 배종의관에 의해 동의보감에 근거한 침과 뜸 치료가 시행되었다. 일반적으로 한의학에서 산증이란 복강의 내용물이 밖으로 돌출되거나 생식기 부위의 통증 또는 복부의 극렬한 통증과 함께 대소변이 제대로 배출되지 않는 증상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비뇨기 증상이나 생식기 또는 소화기의 통증 등의 증상을 아우르는 단어로 해석된다. 이후 1638년 눈병과 함께 산증이 심해지면서 1638년 인조 16년 6월 1일에 청나라에 배종의관인 유후성이 도착하여 침으로 치료받은 병력이 있으며 다음해인 1649년 기록에도 산증이 지속되며 미각 상실(ageusia)과 생식기 주변에 ‘딱딱한 돌기’가 확인되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 생활 3년 차인 1640년 9월 12일 기록에서 목이 타고 마르는 증상에 동반된 오른쪽 마비 증상이 발생하여 발열과 염증 완화에 전통 한의학에서 처방되었던 퇴열탕(退熱湯)을 음용하였으나 증상이 지속되어 10월 16일 조선에 침구 치료를 취한 침의 박태원을 보내 달라고 청해 실제 다음해인 1641년 10월 16일 박태원이 청나라에 도착한 기록이 심양일기에서 확인된다. 소현세자는 1641년까지 반신 마비가 지속된 것으로 보이며 기침과 천식이 지속되며 오한과 오심과 음식에 대한 미각상실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었다. 1641년 5월 20일에는 더위를 견딜 수 없고 자주 갈증을 느끼는 증상이 기재되었고 오른쪽 눈에 백태가 끼며 붉어지는 통증이 있었고 연말에는 다시 왼쪽 눈에 눈병이 났다고 기록되었다. 이후에도 1642년 오심과 구역감과 복부 통증이 지속되며 어지럼증이 심해지는 증상이 확인된다. 1643년에는 오한과 열감에 동반된 어지럼증과 입이 마르는 증상이 지속적으로 기록되며 대부분 감기로 판단하여 치료를 하였다. 이러한 기록을 보건대 소현세자의 약 8년여간의 청나라 생활에서 주요하게 기록된 증상 또는 질환은 산증(疝症), 기침과 천식 및 발열로 기재된 호흡기 증상, 어지럼증, 오른쪽 반신마비, 미각상실, 구강 건조, 눈병 등이다. 소현세자가 완전 귀국한 이후의 승정원일기(Appendix 2)에 자세히 기록된 증상은 발열, 기침, 호흡곤란, 침이 탁하고, 목마름, 미각상실, 식후 혼곤증, 복통, 어지럼증 등이 기록되었고 주로 호흡기 증상이 보이며 사망에 이르렀다. 이러한 소현세자의 지속적인 병력의 기록을 보면, 호흡기, 소화기 및 대사성 질환의 증상을 추정할 수 있으며 귀국 이후에는 학질로 최초 진단되었던 발열을 동반한 호흡기 질환이 지속되면서 호전과 악화를 반복하였고 마지막 6일 동안은 전통적으로 감기, 독감, 또는 다른 급성 발열 질환을 지칭하는 용어인 상한(傷寒)이 지속되었음이 소현을유동궁일기에 기록된 바 폐렴으로 인한 패혈증(sepsis)으로 사망하였을 가능성을 우선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Table 1). 이후 소현세자의 시신에서 관찰된 피부 변색을 동반한 코, 입, 귀 등의 혈성액 유출의 조기 부패로 추정되는 소견을 종합한다면 앞서 언급한대로 패혈증이 직접사인으로 작용하였다고 보이며 그 선행사인으로 폐렴의 가능성을 추정하고, 최종 선행사인인 원사인으로는 자가면역질환이나 대사성 질환을 추정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특히 그의 호흡기나 소화기 그리고 비뇨기 등의 전신증상이 동반된 지속적인 목마름, 식후 혼곤증 등과 함께 조기 부패 소견을 보면 자가면역질환인 성인 발병 자가면역성 당뇨병(latent autoimmune diabetes in adults)을 원사인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드물지만 증상에 기반한다면 남성 쇼그렌 증후군(Sjö gren's syndrome)의 가능성 역시 추정해 볼 수 있다. 다만 현대 의학의 검사 소견 없이 실제 의학적 진단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문헌만으로는 적확한 질병의 추정은 불가하다.
고 찰
본 연구에서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심양일기, 소현을유동궁일기 및 심양장계의 문헌 분석을 통해 소현세자가 약 8년의 청나라의 볼모 생활 중 다양한 증상을 보이는 질병으로 치료를 받은 병력을 확인하였으며 귀국 후에도 지속적인 질병으로 인해 치료를 받다가 사망하였다고 판단하였고 시신의 상태에 따른 독살의 가능성을 배제하였다. 문헌 고찰을 통한 분석으로 소현세자의 직접 사망원인으로 패혈증, 선행원인으로 폐렴, 최종 선행사인인 원사인으로는 자가면역질환 또는 대사성 질환으로 추정하며 사망의 종류는 질병사로 판단하였다. 이러한 추론은 소현세자에 대한 직접적 부검이 시행되지 않은 상황이며 전통 의학적 기록 및 역사 기록을 현대 의학의 직접적인 해석과 적용에 적확성의 한계가 분명히 존재한다. 다만 기록의 국가 조선의 세자였던 소현세자에 대한 다수의 문헌이 존재하는 만큼 사망원인에 대한 합리적인 의학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보며 본 연구가 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판단하며 향후 본 연구를 시작 점으로 우리나라 전통 역사적 인물에 대한 과학적 접근이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Notes
Conflicts of Interest
No potential conflict of interest relevant to this article was reported.
Acknowledgments
I would like to thank writer Byeol-i Hwang for her assistance in organizing the data for this study.